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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정 Oct 27. 2021

강아지가 있었다

하나뿐인 강아지의 삶

강아지가 있었다. 아주 작은 강아지.

검은 털과 갈색 털이 얼룩덜룩하게 섞여 있는 작은 요크셔테리어였다. 작은 칸 안에 들어있던 그 강아지는 유난히 약해 보여서, 같은 칸을 쓰는 하얀색 친구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누나, 얘가 자꾸 공격당해서 마음 아파. 태어나서 지금까지는 그랬을지 몰라도 우리가 얘랑 같이 살면 이제 행복할 수 있을 거 같아.”

     

우리는 그 작은 강아지를 데리고 왔다. 머리털 나고 본 가장 작은 생명체였다. 그녀는 낯을 꽤 가렸다. 가족들 옆에서 자기까지 한 달이란 시간이 걸렸으니 말이다. 그녀는 우리에게 마음을 열었고, 우리는 “하나”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우리의 첫 강아지이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였기에 그런 이름을 정하게 되었다.     

하나는 다른 강아지들과 달랐다. 짖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일절 짖지 않았다. 사람을 보면 그저 좋아서 배부터 발랑 까기 일쑤였다. 집을 지킬 명목으로 데려온 것은 아니지만, 낯선 이가 침입했을 때 집을 지킬 수나 있을까 장난 섞인 걱정이 들 정도였다.

    

“누나, 하나는 우리 만나서 행복한 강아지다. 그렇지?”

누군가가 사랑으로 키우다 길거리에 내몰린 강아지들을 보며 동생은 종종 이런 말을 건넸다. 그 말에 동의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울컥 화가 나기도 했다. 인간에게 선택받지 못한다면, 인간에 의해 죽음을 강요당하는 삶이 동물의 삶인 것일까. 그렇다면 그건 너무 이기적인 일인 것 같아 괜히 곁눈질로 하나를 슬쩍 보았다.

하나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맞아. 속상하긴 하지만 나는 괜찮아! 언니를 만나서 난 정말 행복한 강아지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내 불편한 마음이 만들어 낸 망상이지만 말이다.


“고마워. 우리는 하나를 만나서 행복한 사람이야.”

하나를 끌어안고 말해줬다. 요즘 보기 드문 대가족임에도 불구하고, 바빴던 가족들에 항상 혼자 있던 할머니에게 하나는 아주 좋은 짝꿍이 되어주었고,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온 아빠의 방패가 되어주었다. 엄마에겐 다이어트 파트너가 되었고, 삼촌과 이모에겐 귀여운 조카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나에겐 대나무 숲이 되어주었다.

     

하나를 만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누구나 겪는 학창 시절만큼 울기도 많이 울었다.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 드릴까 소리를 죽이고 울 때마다 신기하게도 하나는 알았다. 짧은 다리로 뒤뚱뒤뚱 걸어 들어와 내 허벅지를 손으로 긁었다. 자신을 들어 올려달라는 것이다. 구부린 다리 위에 올려놓으면 가만히 쳐다보다가 내 눈물을 핥았고 이내 가슴팍으로 기댔다.   

   

하나는 어느 날부터 급격하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불러도 느릿하게 돌아봤고, 좋아하는 간식을 줘도 느릿하게 걸어오거나 먹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가족들은 걱정이 되었지만, 바쁜 탓에 병원을 빨리 데려가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물조차도 먹지 않는 모습이 걱정돼서 엄마는 하나를 데리고 병원을 가보겠다고 했다.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한 뒤, 하나는 엄마의 품에 안겨 나갔다.     

“큰 문제는 아니고 우선 수액 맞으면 된대. 한두 시간 걸린대서 맡겨놓고 나왔어”

엄마의 전화를 받고 다행이라 느끼고 하나가 돌아오면 같이 놀 장난감을 구경하러 갔다.    

 

“유정아. 하나가 죽었대.”

처음 들어보는 할머니의 울음소리였다. 잠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말이겠지만, 할머니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까지 했다. 엄마가 하나를 화장하러 가고 있다고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하나는 수액을 맞던 도중, 1시간쯤 경과했을 때 쇼크사로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다고 했다. 엄마도, 아빠도. 대가족임에도 가족 단 한 명도 없는 그 자리에서 홀로 죽었다고 했다. 나도 함께 가겠다고 했고 그 후 마주한 하나는 차갑고 딱딱했다.

     

옷과 담요를 겹겹이 둘러주고 품 안에 넣은 채 엄마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하나가 추운가 보다고, 너무 차갑다고. 하나를 화장하러 가는 내내, 차 안에는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눈물이 한 방울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삼촌도 운전을 하는 내내 흐려지는 눈에 몇 번을 차를 세웠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이 주삿바늘만 제발 빼주세요.”

화장을 시켜야 하는데 자꾸 품에서 내놓지 않으니 긴 시간을 대치하다가 끝내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가는 길만이라도 아프지 않게, 주삿바늘 없이 무지개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에게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미안하단 말만 듣고 가면, 가는 길이 속상해 몇 번이고 돌아볼까 봐, 귀에 조용히 말해주었다.

“고마워. 우리는 하나를 만나서 행복한 사람이야.”

     

하나는 한 줌의 재가 되었고, 죽어서라도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강아지 친구들이 다 같이 묻힌 곳에 함께 묻어 주었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하나라는 단어를 금기시하였고, 엄마는 빠르게 하나의 물건을 모조리 버렸다. 워낙에 짖지 않던 아이이기에, 우리 집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문 앞에 누워 기다리고 함께 이불을 덮고 자던 가족이 없어진 것과 집안에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혼자 계시는 할머니가 매일 하나의 사진을 보며 나랑 같이 가자 우는 탓에 우리는 긴 고민 끝에 다른 강아지를 데려오기로 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 가득했다. 다시금 인간에 의해 생사의 기로에 놓인 강아지를 선택하여 데리고 온다는 것이, 또 이 아이의 아픔 앞에 속수무책일 상황들이 불편하고 두려웠다.

      

반려동물이라는 단어가 힘들어졌다. 그들에게 인간은 진정 반려자가 맞을까? 하나가 떠난 순간은 너무나 힘들었지만, 한편으론 하나가 세상을 떠나고 누구보다 행복할 것 같다는 확신이 가득했다. 인간의 이기심은 어디까지일까. 우리는 강아지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했고, 우리의 무지와 바쁘다는 핑계로 강아지의 아픔을 못 본 척했다. 나는 강아지를 만나고 나의 이기심이, 인간의 이기심이 어디까지가 끝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선택되지 못해 안락사를 당하는 것보다, 사람과 함께 살며 동물 관절에 좋지 않은 미끄덩한 작은 집 안에서 사는 삶은 동물에게 행복한 삶일까?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은 행복하고 숭고한 결말일까? 딱 하루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강아지를 넓은 풀밭에 내려놓고 싶다. 마음대로 뛰어놀라고. 그러다 풀밭이 너무 좋아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네가 돌아오고 싶을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마음껏 놀라고. 뛰지 않아도 괜찮고, 마지막 모습처럼 느릿하게 누워만 있어도 괜찮으니까 강아지답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고 싶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간 반려동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나 죽을 때, 오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무작정 기다리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 어디에서나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이번엔 내가 너를 찾아 천국을 헤맬 테니까 너를 찾는 날들 속에 나를 알아본다면 그때 나를 보고 싱긋 웃어달라고 마음으로 전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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