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 무척 낯가림이 심하고 겁이 많았다. 한 달마다 돌아오던 짝꿍 바꾸는 날이 제일 싫었고, 학교에서 사귄 친구네 집에 처음 놀러 가 본 것도 5학년 때였다. 그전에 학교 친구들 중에 기억에 남는 아이는 두세 명 정도가 다이다.
이러니 나는 학교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말도 별로 하지 않으니 친구와 별다른 일도 없었다. 혼자 있는 것이 제일 편한 아이였다.
그런 그 아이가 어느 날 남자아이와 멱살을 잡고 학교 앞 거리 한복판에서 싸움질을 했다.
나는 남동생과 유달리 친하고 끈끈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어릴 땐 나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던 남동생은 또래보다 키도 작고 마른 편이어서 나와는 한 살 차이였지만 보기에는 두 살 터울은 나 보였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자꾸 남동생을 괴롭혔다. 그 아이의 존재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굣길에 그 아이와 마주쳤다. 학교 운동장에서부터 뒤를 쫓아오며 자꾸 동생에게 기분 나쁜 말을 던지고 가까이 와서 툭 치고 갔다. 나와 달리 개구쟁이였어도 싸움 같은 건 해 본 적 없던 동생은 그 아이가 무서웠던지 자꾸 내 뒤에 숨었다. 나는 누나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최대한 근엄하게 그 아이에게 그만하라고 했다.
학교 앞 분식집을 지날 때였다. 그 아이가 다가와서 또 동생을 때리려고 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나보다 동생이었지만 키가 내 이마 정도는 왔다. 그러자 갑작스러운 나의 제지에 그 아이도 당황했는지 놀라다가 이내 내 멱살을 잡았다. 질 수 없었다. 나도 그 녀석 멱살을 잡았다.
순식간에 하교하던 아이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싸움 구경을 시작하고, 분식집 앞에서 핫도그를 사려고 기다리던 아이들도 어느새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녀석의 눈매가 매서웠다. 순식간에 나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도 내가 컸으므로 최대한 손으로 밀어내며 주먹을 피했다. 차마 나는 때릴 수가 없어 멱살을 쥐고 밀어내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발로 내 아랫배를 걷어찼다. 헉하고 숨이 막혔지만 본능적으로 나도 발을 올려 그 녀석 정강이를 찼다. 또 날아오는 주먹을 막고 얼굴을 밀쳐내고 발을 발로 차고.. 키 작은 두 초딩들의 난투극이었지만 꽤나 치열했다.
멱살을 놓지 않고 씩씩거리며 서로를 노려봤다. 그 아이도 나도 자존심이 있으니 먼저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 아이도 나에게서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고민하는 듯했다. 나는 그 아이의 멱살을 놓고 확 밀쳐냈다. 그리고는 다시 또 내 동생 괴롭히면 가만 안 두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주변에 구경하던 아이들에게 뭘 보냐고 소리 지르며 괜스레 화풀이를 했다. 그리고 동생 손을 붙잡고 아이들 틈을 비집고 빠져나왔다.
그날 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내가 용감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람은 용감해지는 순간이 있다.
엄마는 다가오는 차를 보고 뛰어들어 아이를 감싼 자신의 몸으로 그 쇳덩이를 받아낸다. 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 아빠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아이를 구한다. 앞에서 달리는 차의 이상함을 감지한 한 운전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차로 그 차를 멈추어 생판 모르던 사람을 살려낸다. 소방대원들은 불이 나면 자신의 안위에 연연하지 않고 뜨거운 화염 속에서 사람을 살린다.
그게 사람뿐일까. 길고양이도 제 새끼를 해칠까 자신의 몇십 배가 되는 인간에게 발톱과 온몸의 털을 세우고 매서운 눈빛으로 덤벼든다.
세상에는 용기라고 말할 수 있는 다양한 순간들이 있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망설임이 없는 용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위에서 말했던 순간들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사람들이 마음속에 모두 그것을 품고 있기는 하다 쳐도 언제 그것이 발현되는가.
그때 나의 용기가 발현되게 만든 것은 그 녀석일까 내 동생 녀석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 동생 녀석이었다. 그 아이가 나를 괴롭혔다면 혹은 다른 사람을 괴롭혔다면 나는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소중한 내 동생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그 아이가 아니었고 다른 누구였어도 나는 그와 싸웠을 것이다.
사람이 망설임 없이 용감해질 때는 자신이 무언가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나 자신일 수도, 내 가족일 수도 있으며 일면식 없는 타인일 수도, 길 잃은 동물일 수도 있다.
우리의 머릿속에서 어떤 존재를 지켜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은 우리가 모르는 신비로운 길을 지나 마음속의 용기에게 가 닿는다. 그리고 마음은 다시 머리에게로 가 몸을 움직이라고 한다.
찰나의 순간에 머리와 마음, 그리고 몸이 우리를 움직인다. 우리는 그렇게 용감한 사람이 된다.
(사진은 어릴 적 제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