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할머니의 치킨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랑

by 엘레니

버스에 앉았는데 경로석 옆에 붙어있는 글귀가 보인다. “세월을 버텨온 만큼 대단한 당신” 경로석에 앉으실 어느 어르신에겐가 보내는 위로와 응원이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그 글귀는 항상 그 자리에 있겠지.




가끔 할머니가 사 오시던 치킨이 생각났다. 양념이었는지 후라이드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지만 할머니는 나와 동생이 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는 날이면 치킨을 사 오셨다.


나는 애엄마가 된 지금이 되어서야 그 치킨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 들었다.

“엄마, 할머니가 우리 운동회날에 치킨 사 오셨던 거 맞지?”

엄마는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며 그 옛날 얘기를 왜 꺼내나 싶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하셨다.

“응, 그랬지.”

“그런데 할머니는 우리 운동회날이 언제인지 어떻게 아셨어? 엄마가 얘기해 준 거야?”

“응.”

“아~ 그럼 할머니가 치킨 사간다고 그러셨어?”

“할머니가 말씀이나 많은 분이셨어~? 말이 없으셨잖아. 어머님~ 애들 운동회가 이날이에요~ 하고 말씀드리면 이렇다 저렇다 말씀도 없으시고 그냥 그날 치킨 사 가지고 버스 타고 오시는 거지.”


그랬다. 생각해 보니 할머니는 말씀을 많이 하시지는 않으셨다. 우리가 귀찮게 해도 “왜 그려~ 그만 햐~” 하시는 말씀 한마디면 족하셨고, 다른 할머니들처럼 “우리 손주, 우리 손주~” 하시며 어째서 예쁘다, 착하다 말 한마디를 하시는 분도, 머리 한 번 쓰다듬고 손을 잡아주시는 분도 아니셨다.


운동회날 우리 집에 오셔서 치킨을 먹는 우리에게도 운동회에서 무얼 했는지, 달리기는 몇 등을 했는지, 하다못해 당신이 사 오신 치킨 맛이 어떤지도 묻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랬는지 할머니께서 우리를 예뻐하신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무엇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는지 어릴 때는 몰랐다. 아니,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알겠다. 내가 놓친 장면들이 보인다. 그리고 들린다. 느껴진다.

“왜 그려~”라는 말 뒤 할머니의 넉넉한 웃음소리, 치킨을 먹는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주름진 눈, 할머니 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우리를 위해 부엌에서 밥을 짓고 계시던 뒷모습, 손주들이 오면 주실 용돈을 고무줄 치마 속 쌈지에 넣어 두시던 손길.

표현하지 않았다 생각했지만 사랑을 계속 표현하고 계셨던 할머니였다.


그냥 지나쳐버렸지만 사실은 그 자리에서 계속 우리를 향하고 있던 사랑의 표현들을 생각해 본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았고, 우리가 들을 수 없었던 그 모습과 소리들을. 그리고 지금에서야 느낄 수 있는 그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할머니에게 내가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던 시간이 짧았기에 아쉬워서일까. 운동회날 할머니가 사 오셨던 치킨을 생각하며 아직도 나는 할머니를 마음 속 깊이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