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연한 커피의 진실

by 엘레니


월요일이다. 육아휴직 중인 나는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 어질러진 집을 치우고 청소기를 돌린다. 설거지까지 하고 나면 11시가 조금 넘는다. 월요일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가 12시 반에 끝난다.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 전에 점심을 먹기가 애매하여 간단하게 빵과 커피 한잔을 마신다.


그리고 나의 커피는 평소처럼 연하다. 내가 만든 블랙커피를 마시면 남편은 이게 커피인지 커피맛 나는 물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때는 내가 믹스커피를 마실 때이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넣는 물의 양을 보고 믹스커피 두 봉지를 넣느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하면 깜짝 놀라며 무슨 맛으로 먹냐고 다시 묻는다. 나는 맛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커피를 연하게 마시게 되었을까. 사실 그것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내가 수험생일 때이다. 한 달 생활비가 빠듯했던 나는 길거리에서 1,000원짜리 커피도 사 마시기가 아까웠다. 그래도 커피는 마시고 싶었다. 나는 마트에서 커다란 커피믹스박스를 사서 고시원에 두고 거기에서 커피믹스봉지 한 다발을 가방에 넣어 학원 사물함에 가져다 두었다. 종이컵 한 줄과 그 옆 종이컵 하나에 꽂혀있는 커피믹스 한 다발이 내 사물함의 오른쪽 맨 앞, 책들 앞에 나란히 놓여있었다.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딱 두 번이었다. 점심식사와 저녁식사 후.

식사를 마치고 종이컵과 커피믹스 봉지 하나를 꺼내 들고 학원 내 정수기로 간다. 종이컵에 탄 커피는 왼손에, 치약을 묻힌 칫솔은 오른손에 들고 학원 옥상으로 올라간다. 내가 다니던 학원 옥상에서는 한강이 잘 보였다. 담배를 피우는 무리들을 비켜 조금 한 적한 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한강을 바라보고 저녁시간에는 운이 좋으면 유람선이 지나가는 것도 본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유람선과 한강을 보며, 시원한 바깥바람을 맞으며 시험이 끝나면 저 유람선을 꼭 타리라 마음먹었다.

커피를 다 마시면 곧바로 오른손에 들고 있던 칫솔을 입에 물고 화장실로 직행한다. 그것이 나의 휴식시간이었다.


이쯤 되면 내가 왜 커피를 연하게 마시게 되었는지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최대한 오래 쉬고 싶었다. 그렇다고 카페에 앉아서 다른 수험생들과 노닥거릴 수는 없었다. 그때의 내가 타당한 휴식이라며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은 식사 후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은 당당히 쉴 수 있었다. 그래서 작은 종이컵에 물을 찰랑찰랑 쏟아질 것처럼 부어서 옥상에 올라갔다. 뜨거운 커피를 호로록호로록 조금씩 아껴 마시며 사실은 더 쉬고 싶어서 잔꾀를 부린 것이다.


그래도 그 시간이 있어 행복했다. 식사 후 한강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 사이의 시간에 에너지를 최대한 꾹꾹 눌러서 채우고 사용했다. 연한 커피 한 잔 덕에 나의 수험생활은 낭만적일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나는 커피가 진하면 싫다. 컵에 담긴 커피물의 높이와 나의 휴식시간이 비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에 마시기 위해 믹스커피에 물을 잔뜩 넣는다. 하지만 반도 마시지 못한 채 찾아오는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수업 시간이 되어 다시 교실로 가야 한다. 돌아오면 내 커피는 책상에서 식어있다.


이런 일을 항상 겪으면서도 나는 커피를 진하게 타지 않는다. 그냥 커피가 많이 담긴 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만큼 쉴 수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게 생기는 모양이다.


지금도 그 연한 커피를 마시며 이 글을 쓴다. 미적지근해진 마지막 한 모금을 끝으로 이 글에도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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