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엄마와 자주 이모께서 운영하시던 가게가 있는 시장에 가곤 했다. 이모는 계란과 된장, 고추장 같은 것들을 파는 도소매업을 하셨었다. 한 달이면 두세 번은 방문해서였는지 아직도 가게 안 모습과 시장 안 풍경이 눈에 선하다.
여름철에 가면 시장 안 가게 사이로 쳐진 천막이나 가게 차양막들이 시장의 좁은 골목에 그늘을 만들고, 이모네 가게에는 계란이 상하지 말라고 사람이 아닌 계란을 향해 선풍기 두세 대가 회전을 하며 바람을 불어주었다. 겨울이면 시장 가게문들은 꽁꽁 닫혀있고 이모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높게 쌓인 계란들 앞에 놓인 의자가 우리를 반겼다. 의자 위의 전기판넬을 뜨끈하게 켜고 그 위에서 담요를 덮은 나와 동생은 석유난로 위에서 데워진 우유를 홀짝거리며 이모와 엄마의 수다를 듣고 장난을 치며 놀았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가게 뒤편에 있는 슈퍼에 가서 과자도 하나씩 사 먹고, 돌아오는 길에는 "나비야~" 하고 부르면 어디선가 항상 나타나는 예쁜 고양이를 불러 같이 놀기도 했다. (어릴 때는 그 고양이가 이모가 키우는 고양이인지, 아니면 이모가 밥을 챙겨주시는 길고양이인지 몰랐는데 이모가 키우는 고양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가게 앞 골목길을 이리저리 다니며 각양각색의 물건들과 가게 주인, 그리고 손님들을 구경했다. 이불집은 알록달록한 천들 뿐만 아니라 앞에 진열된 다양한 잡화들이 눈길을 끌었고, 기름집은 고소한 기름 냄새에 코를 한 번 더 킁킁거리며 안을 들여다보게 했다.
그 맘 때쯤 나는 예쁘다는 소리를 꽤나 들었다. 정변 했다면 좋았을걸... 여하튼 그래서 동생과 시장 골목을 돌아다니면 다른 가게 주인아저씨, 아주머니들께서는 00 상회 조카인 걸 알아보시며 용돈을 주시기도 하고 예쁘다는 말을 인사말처럼 해주셨다.
그중에도 나의 기억에 남는 분은 이모네 가게 바로 맞은편에 노점상을 하시던 야채장수 할머니이다. 가게 문을 열고 아이 걸음으로 다섯 걸음, 가게 안에서도 보이는 그 자리에 여름이고, 겨울이고 할머니께서는 노점에 놓인 갖가지 야채들 뒤편에 앉아계셨다. 너무 어릴 적이라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할머니께서 야채를 팔 때를 제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시거나 돌아다니시는 것도 잘 못 본 것 같다.
소란스러운 시장통 상인 아주머니들과는 다르게 야채장수 할머니는 항상 조용조용하시고 드센 느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낯가림을 많이 하던 나는 유난스럽지 않게 조용히 "00이 왔네~" 하고 반겨주시는 할머니가 왠지 더 좋고 정이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담스럽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할머니를 더 좋아했던 이유는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께서 나에게 항상 하시던 말. "아유~ 예뻐라. 00 이는 나중에 미스코리아 나가야 댜~!" 내가 갈 때마다 그 말을 듣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 말을 하도 들어서 미스코리아가 뭔지도 모를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중에 크면 정말 미스코리아에 나가겠구나 싶었다.
할머니의 그 말이 어림도 없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몇 년이 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야채장수 할머니께서 해주신 말은 어릴 적 나의 자존감을 꽤나 높여준 말이었던 것 같다. 미스코리아가 뭔지는 몰라도 예쁜 사람이 되는 좋은 무언가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럴만한 사람이라고 세뇌가 된 거다. 할머니는 의도하지 않으셨겠지만... 자라면서 그리고 나이가 꽤나 들어서도 내가 유독 못나 보일 때, 또는 친구들 앞에서 농담으로 말했다. "나 그래도 어릴 땐 미스코리아 나가라고 했었어!" 그러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고 이만하면 됐지라며 웃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우리 부모님 외에 그 할머니만큼 나를 예쁘다고 무한칭찬하시고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예쁘다는 말은 우리 부모님 보다도 그 할머니께서 더 많이 해주신 것 같다. 어린 나이에도 할머니가 나를 예뻐하시고 좋아해 주신다는 것이 할머니의 눈빛과 목소리를 통해 느낄 수 있을 정도였으니 정말 진심으로 대해 주신 것이다. 그 사랑이 어디에서 어떻게 우러나왔을까 싶다. 어릴 때는 할머니들이 아이들을 보면 그랬던 거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본다면 나 조차도 그런 애정을 남의 아이에게 한결같이 베푼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할머니는 자기 손녀도 아닌 아이에게 그런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 내가 그 행운아였던 것이다.
내가 자라며 엄마를 따라 시장을 가기보다는 집에서 내 할 일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 늘었고 그 사이 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져 점포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간 시장에는 할머니의 자리가 비어져있었다. 나는 왠지 모를 쓸쓸함과 아쉬움으로 그 자리를 한참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그 자리를 연신 되돌아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의 자리가 비어있던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이모네 상회도 문을 닫았다. 야채장수 할머니를 다시 볼 기회는 영영 없어졌다.
내 기억 속의 야채장수 할머니는 인자하다기보다는 해맑은 웃음을 가지고 계셨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해맑은 웃음과 함께 "미스코리아 나가야지~"라고 말씀하셨던 할머니의 모습은 아직도 내 안에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