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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니 Dec 08. 2023

“그만둬도 괜찮은 거야”라는 말의 의미

그만두기 위해서만은 아님을…


  나는 무엇이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다. 타고나기도 참을성이 많아서 어릴 때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하면 한 시간이 넘도록 그 자리에 앉아있던 것을 부모님은 아직도 자랑삼아 말씀하신다. 나는 낯을 많이 가리고 숫기가 없었다. 여자애들에게 많다는 애교도 찾아볼 수 없었고, 말이 많지도 않아 가족들의 귀여움은 오히려 남자아이인 동생이 독차지했다. 늘 조용했고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어른들이 나에게 해주는 “인내심이 많다”라는 칭찬에 그것이 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하나가 주어지면 결과가 어떻든 끝까지 해냈다. 다른 건 잘 못해도 끝까지 참고 해내는 것만큼은 잘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부심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하면 앉은자리에서 끝을 봤고, 체력장에서도 매달리기와 오래 달리기에서만큼은 만점을 놓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아파도 조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그렇게 때로는 미련함과 인내심을 혼동하기도 하며 성격을 재능이라 착각했던 듯하다.


  인내가 나에게 가져다준 좋은 일들도 많다. 크게 이룬 것은 없지만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얻어진 것들 대부분이 무던히 노력하고 끝까지 해낸 것으로부터 받은 것들이다. 다른 이들은 도저히 못하겠다 그만두는 일에도 집요함을 가지고 끝까지 해내는 것은 내가 가진 인내심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몇 번이나 같은 설명을 반복할 때도 큰 소리 내지 않고 내적 한숨 한 번이면 다시 하자 힘을 낼 수 있는 것도 참을성 덕분이다. 또 여러 성공한 사람들의 강연과 책을 보며 느끼기에도 인내심은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기에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런 나였기에 어릴 때 주변에서 여러 가지를 하다가 그만두고 새로운 것들을 자꾸만 시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끈기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 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중간에 그만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것 조금, 저것 조금 하다가 그만두기만 한다면 나중에 그들에게 남는 것이 없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내가 보게 된 것은 내가 믿던 것과 다른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들은 나름대로 무언가를 이루고 살았으며 내가 가지지 못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경험을 갖고 있었다. 한 가지에 몰두하면 오랫동안 그것만 바라보는 나와 다르게 그들의 관심사는 여러 가지였다. 대화를 하며 그들 앞에 펼쳐져 있는 또 다른 세상들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들은 참을성 없이 자신의 일들을 계속해서 그만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낯선 것들을 마주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동안 끝까지 참고 해내는 것이라 정의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그들은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실행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도전은 앞선 것에 대한 포기가 아닌 자신의 길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어가는 노력이었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완성하거나 정해진 종착지까지 가지 않아도 그 과정에서 분명 많은 것들을 얻고 배웠다. 그것은 대단한 재산이다.


  때로는 그런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겁 없이 하던 일들을 벗어나 무작정 새로운 것들에 발을 담그는 그 당찬 마음이 갖고 싶다. 하지만 내 천성을 바꾸는 것은 쉽지가 않다. 지금의 안정된 생활을 두고 다시 바닥부터 시작해야 함을 생각하면 새롭게 발을 내밀다가도 얼른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오랫동안 밟아서 다져놓은 땅에 얼른 발바닥을 붙인다. 까칠한 자갈도 질퍽한 진흙도 없는, 맨들맨들한 고운 흙으로 잘 다져진 내 자리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역시 나에게 새로운 시도는 참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아직은 새로운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없어서이거나, 혹은 경험해보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요즘 소심하게 작은 일들에서나마 그만두기를 실천해 본다. 그중에 하나는 책을 읽다가 중간에 그만두기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엄청난 독서광이라기보다는 책이 주는 편안함을 좋아했다고 할 수 있다. 한 달에 한 권을 읽더라도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활자 속에서 느끼는 잠깐의 고요함을 즐겼다. 그래서 나는 재미없는 책도 끝까지 읽었다. 그건 일종의 책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지만 끝내지 못했다는 느낌을 남기기 싫었던 탓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책을 읽다가 내 취향이 아니다 싶으면 덮고 다른 책을 읽는다. ‘그것 좀 끝까지 안 읽으면 어때. 내가 궁금했던 부분을 읽었으니 되었지’라며 마음속 찜찜함을 달랜다.


  아이들에게도 말한다. 약속한 것은 꼭 지켜야 하지만 충분하다 느끼거나 정말 하기 싫은 것은 엄마에게 얘기하라고. 아이가 그만하고 싶다 말할 때 하루이틀 놀고 싶어서인지 정말로 힘에 부치는 것인지 자세히 보면 어른의 눈에는 보인다. 사실 아이들은 다니던 학원 또는 방과후수업을 그만두거나 바꾸는 것을 대개 꺼려한다. 하루 쉬는 것은 대환영이지만 아예 그만둔다고 하면 힘들어도 가겠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이유는 어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안에서 쌓아온 관계에 대한 미련과 변화와 적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때로는 그것이 포기처럼 보일까 봐 그렇기도 하다. 그럴 때는 “그만둬도 괜찮은 거야”라는 말을 해준다. 그동안 쌓아온 것들은 그 소중함을 알고 감사해하면 되는 것이며, 힘들다면 잠깐 떠나보거나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도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려고 노력한다. 최선을 다했다면 포기가 아니라는 것도 말이다. 나는 아이들이 알아내길 바란다. 원래 하던 방식을 고수하는 것만이, 정해진 결승선에 도착하는 것만이 무언가를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아님을.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으므로 오히려 꾸준히 걸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 더 현명할 때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아직도 아이들과 함께 종이접기를 하다가 실패하면 빳빳한 새 종이를 꺼내지 않는다. 사용했던 종이를 다시 펴서 기어이 그 꼬깃꼬깃한 종이를 가지고 만들어내야 속이 후련하다. 그것이 내가 가진 천성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게 내 장점이 될 때도 많다. 그렇다. 애초에 가진 것들을 모두 내던지는 이들만이 용기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음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또 어떤 일을 끈기 있게 계속해야 원하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천성을 거슬러보려는 노력을 하는 이유는 최소한 마음속에서라도 여러 길을 터놓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만둬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반드시 그것을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그만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멈추어 서기 위함이다. 그만둬야 하는지, 계속해야 하는지 생각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그래야 내가 가진 길을 더 넓힐지, 새로운 길로 이어갈지를 고민할 수 있다. 그렇게 스스로 선택한 그 길만이 배우는 과정이 될 수 있고, 또 기꺼이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그  길을 걸으며 겪는 모든 노력과 과정들을 통해 진정 그만둬야 할 때와 계속해야 할 때를 알아볼 수 있는 혜안을 언젠가는 갖게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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