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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n Jun 22. 2022

단지 구경거리가 아닐 것이다:<그로테스크 클라운 쇼>

한국예술종합학교 2022-1 레퍼토리 <그로테스크 클라운 쇼> 리뷰

    극장에 들어서면 공연 시작 전부터 광대들이 객석의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무대 위를 활보하고 있다. 얼굴에 흰색 칠을 하고 강렬한 표정을 그리고는, 리가 벗겨진 듯한 가발을 쓴 광대들. 몇몇 사람들이 크고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누군가는 휴대폰 카메라를 켜서 그들을 촬영한다. 광대들이 재미있는 포즈를 취해주자, 그 옆 사람도 휴대폰을 꺼내든다. 어떤 신기한 구경거리를 기록으로 남겨두듯이. 광대들이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유독 크게 웃었다. 광대들은 그에게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고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부담을 느끼며 생각하게 된다. 내가 왜 웃었지? 그들이 멀리 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소통하고 있을 때는 재미있게 바라보던 사람들도,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자신을 주목해 가까이 다가올까 봐 철저하게 눈을 피하곤 한다.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존재를 멀리서 '구경'할 때는 우스꽝스럽고 재미있는데, 그들과 가까이 소통하는 건 거부감이 들고 두려운 것이다. 전통적으로 '연극'이라는 형식 자체가, 무대 위 존재들이 우리와 비슷하기에 몰입하게 되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편한 거리를 두고 재미를 느끼는 예술이라 생각했다. 무대 위 존재를 '구경'하는 것과 가깝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는 도처에 존재하는 매체를 통해 우리가 인종, 국적, 문화 등 우리 자신과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보는 태도와 닮아있기도 하다.

    작품은 관객들에게 익숙한 연극에 대한 관습을 뒤집고, 그동안 무대 위 존재를 바라보던 모습을 재인식하게 하면서 우리가 타자화시키고 혐오하고 차별하는 존재들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한다. 광대들은 극 진행 내내 객석의 참여를 이끌어내며 그저 편안한 '구경'으로만 그치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타인에 대한 자신의 위선을 마주하게 만든다. 이러한 형식의 연극은 내용적으로도 익숙한 '영국 고전'으로 머무르던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해체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도처에 존재하는, 임신과 출산으로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게 된 여성의 이야기, 그리고 제주도의 난민과 차별금지법 이슈로까지 이어가면서 점차 연극과 관객의 일상 사이의 안전거리를 좁혀간다. '광대'라는, 본질적으로 인간과 꼭 닮아있으면서도 인간의 삶을 '은유'할 수 있는 존재를 영리하게 활용하여, 작품은 보다 우리 주변에서 논란이 되는 이슈들을 직설적으로 언급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 공연에는 크게 '스튜디오 공연'과 '레퍼토리 공연' 이 있다. '스튜디오 공연'은 연극원 학생들이 직접 연출을 맡는다. '레퍼토리 공연'은 연극원 교수님이 연출을 맡아서, 또는 활발히 활동중인 외부 연출가를 초빙하여 학생들과 프로덕션을 구성해 만드는 공연을 말한다. 레퍼토리 공연의 경우  한 학기에 두 작품 또는 세 작품이 공연된다고 한다.   


 2022-1 레퍼토리 공연 중, '창작집단 뛰다', '궁리소 묻다'의 배요섭 연출이 연출한 작품이다.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상자무대2에서 공연되었다.


오로지 ''의 책임이 될 때

    객석의 관객들은 모두 익명이다. 자기 자신의 아름이나 얼굴을 밝혀, 자신의 행위나 의견에 대한 위험을 감내할 필요가 없다. 그건, 그들은 자신이 객석에 편히 앉아있어야 할 이유를 구체적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는 '다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은 지점은, 그러한 관객의 '군중의 힘'을 해체하는 장면이었다. 광대들이 국제결혼 회사의 직원이 되어 관객에게 국제결혼을 종용하는 장면에서, 광대들은 회사라는 다수의 집단에 속한 익명의 구성원일 뿐이다. 반대로 그들이 말을 거는 객석의 사람은 얼굴을 밝히고 스스로의 선택을 하는 특수한 '개인'이 된다. 광대들이 객석을 훑다가 무작위로 한 명을 지목해 그에게 '딱 맞는 배우자'를 골라줄테니 돈을 내라고 끈질기게 설득하는 순간은, 흔히 알던 극장에서의 권력이 전복되는 순간이다. 관객들은 돈으로 이성을 사는 것이 옳지 않은 일임을 안다. 하지만 광대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그가 거래를 승낙하도록 종용하기에, 다른 사람의 관극이 지체되어 질타를 받지는 않을까 다수의 관객 눈치를 보며 결제하고, 도장을 찍게 된다. 단숨에 '지목당한 한 사람'을 제외하고 관객이라는 다수의 집단을 재형성해, 그 안의 익명의 누군가가 된 다른 관객들은 그를 구경하며 오락거리를 보듯 웃는다. 이는 지목당한 이로 하여금 자신을 향한 타인의 시선과 개인의 책임이 따르기에, 군중의 일원으로 옳지 않은 일을 할 때보다 훨씬 큰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인터넷의 발달로 도처에서 익명성이 바탕이되는 요즘, 자신이 군중이라는 이름 아래에 행했던 폭력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또 하나의 모순이 함께 생겨난다. 돈으로 이성을 사는 것 보다 타인의 문화생활을 성가시지 않게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나쁜 일인가? 지목당한 이와, 그를 구경하던 이들은 모두 군중 속에서 얼마나 많은 윤리가 쉽게 마비되고 있었는지를 우스꽝스러운 광경 아래 소름끼치게 체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지목된 이를 지켜보는 이들은, 다른 이가 광대들의 상대가 될 때에는 웃다가, 광대들이 자신을 응대할 상대를 새로 찾을 때에는 자신이 그 당사자가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리고 다른 이가 선택되면 안도한다. 오로지 '자신의 일'이 되었을 때 마주하는, 자신이 옳지 않은 일을 한다는 감각을 느끼는 것이 거북한 것이다. 관객은 무의식중에, 자신이 군중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옳지 않은 일을 할 것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것에 안심하는 자신의 위선과 비겁함을, 장면이 진행되는 과정 중 마주하게 된다.   


객관적이라는 착각, 순백의 착시

    이렇듯 다수와 개인은 한순간에 그 자리가 바뀔 수 있다. 누군가를 구분하는 본질적이고 고정 불변의 정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광대들이 흰 분필을 가지고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무대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분필로 기찻길을 그리는 순간, 기차 흉내를 내며 그 위를 지나가야 한다는 규칙이 생긴다. 바닥에 태양을 그리는 순간, 그 위에 앉은 사람을 떠받들어야 한다는 규칙과 권력이 생긴다. 분필로 경계를 지어버린 순간, 한 광대가 무리에서 소외되게 된다. 모든 정의와 경계는 이처럼 임의적이다. 다수와 소수, 우월함과 열등함은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문제이다. 광대들이 무대를 사용함에 따라, 분필로 그린 경계와 규칙들은 점점 흐려진다. 광대들은 이러한 임의성의 논리에 관객까지 끌어들인다. 한 광대가 관객의 신발 둘레를 따라 그리고 거기에 냄새가 나는 듯한 표시를 그려넣자, 모든 광대들은 코를 막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 관객을 피하기 시작한다. 타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소외시키는 것 역시 임의적이라는 것, 관객은 그것을 소외당하는 이의 입장에서 느껴볼 수 있다.

    작품은 '흰색'을 자주 사용하는 듯하다. 흰색은 가장 깨끗하고 객관적인 색처럼 보이지만, 누군가가 빛을 어떻게 비추느냐에 따라,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가장 다르게 보이는 색이다. 흰색의 물체 위에 보이는 색은 나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데스데모나의 흰색 '손수건'은 극 중 누가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변한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손수건이고, 누군가에게는 연인 이외에는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속옷'이 된다.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에 따라 대상의 의미는 바뀌고, 거기에서 대립과 충돌이 생겨난다. 또한 사람들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가장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흰색'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어떤 입장에 대한 지지와 반대, 포용과 혐오가 숨어있다. 극의 마지막 장면, 흰색 천 아래래에 몸을 감추고 숨어있는 광대들은, 칠판에 자신의 논지를 쓰면서 큰 목소리로 강력하게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다른 한 광대의 의견에 침묵함으로써 찬성을 표하게 된다. 이는 어쩌면 '이게 맞나? 아닌가?'하는,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자신의 입장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피하고 싶어서 택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광대들이 각각 흰 천 아래에서 나와 자신과 친구들이 겪어야 했던 부당함,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면서 칠판으로 달려가기 시작한 순간, 객관적인 체 하는 흰 분필로 칠판에 쓰여진 의견과 글자들은 흐려진다. 작품은 '차별 금지법'에 대한 반대 의견을 비판하며 어느 정도 분명한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그 흐려진 칠판 위에 더 이상 식별가능한 어떤 글자도 남아있지 않은 마지막 장면의 이미지는, 극장을 나선 모두가 각각 직접 흰 포장 밖으로 나와 목소리를 낼 때 극의 의미가 현실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인식을 준다.  


     작품은 타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대해 명확한 의견 표출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직설적인 대사보다 더 강력하게 기억에 남는 건, 극을 보며 변화하는 관객의 태도와 궁극적으로 이를 이끌어낸 극의 형식이다. 우리는 극장에 들어서서 광대들을 처음 마주할 때 웃음, 때로는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익숙해지고 친밀해진다. 일부 장면에서 광대들의 말이 '낯선 언어'로 들리다가, 점점 우리와 친숙한 말처럼 들리는 것처럼. 낯선 대상에 대한 혐오와 비웃음을 지우는 방법은, 어쩌면 생경한 구경거리처럼 느껴지는 대상들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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