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기후비상사태: 리허설> 리뷰
왜 제목 뒤에 ‘리허설’이라고 소제목을 붙일까? 올해 5월 11일부터 6월 5일까지 국립극단 '창작공감: 연출'의 일환으로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기후비상사태: 리허설> 이야기다. 공연을 예매할 때부터 문득 그 소제목이 궁금했다. 그리고 공연에서 그 이유가 꽤나 직설적으로 드러났다. 기존의 모든 것을 지워내는 암전 이후 무대 위에 생성되는 건, 삶에 대한 리허설이라는 것이다. 광주에 다녀온 작가가 ‘예전과 같지 않은 제자리’로 돌아왔듯, 관객은 연극이라는 리허설이 끝나면 이전과 같은 듯 같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작가는 객석 등이 꺼지기 전 편지글 형태로, 작가 역 배우의 목소리를 빌려 담담하게 상기시킨다. 팬더믹으로 극장이 문을 닫았고, 이 공연 역시 공연이 불투명했다는 사실을. '코로나'라는 일종의 자연재해는 리허설 없이 '현실'로 닥쳐왔고, 극장이라는 리허설의 공간 역시 문을 닫은 채,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 매몰되어왔다. 작가는 이제 그리웠던 공연 전 암전을 되살리며 우리가 마주한 자연의 위기에 대한 리허설을 시작하고, 다시 모든 걸 새로 써 볼 희망을 가지고자 한다.
연극은 ‘기후 위기’를 주제로 대본을 써야 하는 작가의 여정을 따라가는 형태이다. 작가는 기후 위기 관련 자료들을 몇 달째 보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 와닿지 않아 글이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연극을 만들기 위한 여러 리허설들을 시작한다. 유명인들의 연설을 비롯해, 익숙히 접해온 자료들을 무대에 올려 보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는 얻지 못하고 리허설은 매번 실패다. 그가 무대에 올리는 자료들, 즉 우리가 '편안한 자세로' 보는 책과 나무위키, 유튜브 속 자료들은 나와는 너무 먼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직접 참여하는 리허설은 결코 아닌 것이다. 작가가 직접 참여해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되는 리허설은, 광주에서 아파트 붕괴 사고를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그 이후에도 여전히 글을 한 글자도 쓰지 못했지만, '권력 구조 아래에 위치한 이들의 무력함'을 느낀다. 그리고 다른 지원보다도 '꾸준히 관심 가져달라'는 희생자 가족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게 직접 체감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돌아갈지에 대한 ‘리허설’은 작가를 변화시킨다. 작가는 결국 가진 자들이 굴리는 세상에서 자신이 기후에 가진 관심은 힘이 없다고 깨닫는다. 게다가 지금까지 무관심해왔기에, 자신은 기후 문제를 다룰 자격이 없다 결론짓는다. 이 일련의 과정은, 조명을 다는 장치가 다 드러난 텅 빈 무대에 세트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형태, 즉 연극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 같은 형태로 제시된다. 작가가 리허설을 겪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리허설이 관객에게도 그만큼 닿을지는 의문이다. 기후와 자본주의를 연결 지으려는 시도는 여기저기 파편적으로 제시되어 그 논리를 따라가기 힘들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일상 속의 생각들은 논리적인 방식을 구성하며 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불쑥 튀어나옴’이 환경 문제가 우리의 일상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 한 사람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과, 극장에 모인 수백 명의 일상으로 확장되는 것은 다르다. 후자로 향하려면 이 '리허설'은, 프로덕션으로 비유하자면 최소한 첫 번째 런을 돌 정도로는 조직화되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이 나오고, 소품이 정리되고, 세트가 사라지고. 일반적인 연극이라면 여기에서 끝나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에는 또 한 겹의 리허설이 덧씌워진다. 작가는 대본을 완성한 후, 실제 기후행동을 위한 여정을 떠난다. 거기에서 공항을 짓겠다고 작은 섬 하나와, 갯벌이 사라지게 생긴 멀지 않은 미래의 상황을 그려본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실제 목소리를 듣는다. 작가는 자신이 직접 움직이며 더욱 적극적으로 겪은 또 한 번의 ‘리허설’을 통해 '남들만을 탓하지 않고 나 역시 행동하겠다'며, 더 나아간 깨달음을 얻는다. 이 부분은 연극적 표현이 제거된 빈 무대에서 진행된다. 작가가 다녀온 장소들의 실제 사진들만을 보여주고, 실제 작가의 연설문을 담백하게 낭독한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이 편안히 책과 유튜브에서 자료를 보던 경험과 연관 지어, 흔히 말하는 '연극'의 형식을 탈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즉 세트 위에 극화된 대본을 통해 ‘가상 세계’를 보여주지만, 그렇기에 너무도 남의 이야기인 연극의 형식을 비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사실 이러한 장면도 작가라는 '남의 이야기'이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연극의 작위적인 어떤 것이 아닌, 현실과 가까운 것들을 '리허설'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보여진 흥미 위주의 랩과 농담들, 다소 흥분된 장면들에 주의가 더 쏠렸기 때문일지....... 작가가 '질질 짰다'는 것과는 다르게 오히려 이 장면은 남의 일처럼 멀리 느껴지고, 심지어 너무 '길다'라고 느껴진다. 머리로는 의도를 계산해 볼 수 있겠는데, 모종의 죄책감을 가질지언정 마음으로는 오히려 앞부분, 작가가 좌절하고 끝난 부분이 더 '재미있는' 것이다. 작품의 리허설이 관객에게 잘 오고 있는지는 의문이 생긴다.
작가에게는 작품 속 일련의 고민과 경험이 가치 있는 리허설이었을 것이다. 기존에 가진 사고방식과 연극에 대한 관습에서 탈피해 어떤 것을 써야겠고, 어떤 메세지를 나눠야겠다는 것을 깨닫게 된 한 과정. 하지만 공연은 어쨌든 '결과물'이다. 리허설이라는 의미는 관객이 '결과물'로서의 작품을 보고 그 경험을 자신의 인생의 과정 속에 가져온다는 뜻이다. 나중에 공연이 완전히 막을 내리고, 작품을 본 모든 관객이 자신의 일상 속에 들어가 삶을 살게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어떤 '결과물'로서 이 작품을 바라보게 된다면, 작가는 고통스러웠던 만큼 만족스러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