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三原色

by 지로 Giro


내게는 상하이에 아주 소중한 인연이 있다. 한 분은 닥터, 한 분은 전직 은행가. 왜 그들이 특별하냐고 묻는다면, 은행가 친구와는 25년, 닥터 친구와는 13년—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인연이기 때문이다.


특히 2018년, 그 해를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다.


남편은 2017년 직장 때문에 싱가포르로 돌아갔고, 나는 아이들 학년 문제와 교육사업으로 상하이에 남기로 했다. 당시 나는 특수교육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매일 아이들과 함께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하교 시간에 맞춰 다시 학교로 가서, 피아노 학원, 바이올린 레슨, 수영, 미술, 학원까지—아이들의 하루 일정을 따라 뛰어다녔다.


아이들은 대부분 3세에서 7세 사이였다. 나는 매일 아침 안전 회의를 열며 하루를 시작했고, 그 시기 친정엄마도 잠시 상하이에 와 계셨다. 하지만 몸 상태는 점점 이상해졌다. 뭔가가 소화되지 않는 느낌이 들었지만 병원에 가는 게 두려웠다. 그렇게 몇 주를 버텼던 것 같다.


엄마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셨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배달 음식을 시켜 먹던 어느 날, 저녁 무렵부터 토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약을 먹고 잠시 괜찮아졌지만, 아이들이 잠든 밤 11시쯤부터 다시 격심한 구토가 시작됐다. 노란 물이 나올 때까지 밤새도록 토했고, 아이들이 자고 있는 모습에 차마 깨우지도 못했다.


새벽 6시, 나는 아이들을 흔들어 깨웠다.

“엄마가 죽을 것 같아. 병원에 가야 해.”엄마와 남편한테 도 전화를 했다.


앰뷸런스를 부르고, 아이들에게 옷을 입히고 나는 담가에 들려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들과 떨어질 수 없어 고급 VIP 병실을 요청했다. 피검사, 초음파검사를 거쳐 결국 입원. 아이들은 겁에 질렸고, 큰아이는 은행가 이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가 죽게 생겼어요. 제발 빨리 와주세요!”


친구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닥터 친구에게 연락을 했고,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때 한국은 폭설로 엄마와 언니는 오지도 못했고, 남편은 뉴욕 출장이었다.


은행가 친구는 아이들을 도우미 아주머니와 함께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했고, 닥터 친구는 병원에서 나를 돌보았다. 하루 종일 소염 진통제를 맞았지만, 담낭은 이미 터지기 직전이었다. 병원 측은 응급 수술을 결정했다.


친구가 가족 동의서에 서명하고, 나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내시경으로 배에 세 개의 구멍을 뚫는 방식이었다. 수술은 두 시간이 걸렸고, 제거된 담낭에서는 무려 180개의 결석이 나왔다.


마취가 덜 풀렸을 때 들려온 의사들의 대화가 기억난다.

“내가 수천 번 수술을 했지만, 이렇게 많은 결석은 처음이야.”

“그러게, 이 사람은 돌만 먹고 살았나 봐!”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상처가 너무 아파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병원에 있는 일주일 동안 12킬로그램이 빠졌다. 화장실에 일어서 걸어갈 때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퇴원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은행가 친구는 잘 훈련된 도우미 아주머니를 몇 달 동안 내 곁에 붙여주었다. 닥터 친구는 병원 최고의 집도의와 연결해주었고, 수술과 회복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어느 날, 아이들과 산책을 나갔다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길에서 쓰러졌다. 아이들이 놀라 울고 있었고, 지나가던 남성 두 분이 나를 일으켜 세우려다 난감해했다. 그때 알았다. 기운이 빠진 사람을 일으켜 세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하이의 두 친구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그들의 마음은 마치 삼원색처럼 각기 다르면서도 어우러져, 내 인생의 위기를 따뜻한 빛으로 물들였다.

상하이, 나에게는 은혜의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