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나에게 보내는 편지

by 지로 Giro

제1장 – 나는 더 이상 딸이기를 멈췄다

열일곱의 나는 생의 무게를 미처 짐작하지 못한 채 세상의 문턱을 넘었다. 대학이라는 낯선 풍경 속에서 나는 배움보다 버티는 법을 먼저 배웠다. 낮에는 그림을 들고 여행사를 전전했고, 밤이면 낯선 언어를 귀에 익히며 통역을 했다. 그렇게 흘린 땀은 등록금으로 바뀌었고, 한 장의 졸업장으로 응고되었다.

사회는 더 매서웠다. 나는 누구보다 먼저 출근했고, 마지막까지 불을 끄고 나왔다. 그렇게 번 돈은 내 몫이 아니었다. 넉넉 하지 못했던 친정을 향해 흘렀고, 나는 그것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기꺼이 감내했다. 언젠가 이 사랑이 돌고 돌아 나를 감싸주리라, 어리석게도 믿었다.

그리고 나는, 엄마를 위해 작은 집을 마련했다. 차곡차곡 모은 돈과 마음을 모아 한 칸, 어머니만의 평안을 담을 공간을 만들었다. 그 집은 곧 내 청춘이자 헌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 소중한 의미는, 단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어느 날, 나는 알게 되었다. 언니가 그 집을 팔아버렸다는 것을. 내게는 아무 말도 없이, 그 돈은 그녀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을.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심장은 천천히 찢겼고, 믿음은 조용히 죽어갔다. 피붙이라는 말이 이토록 날카로울 수 있다는 걸, 나는 그제야 배웠다.

그날 이후, 나는 친정과의 끈을 잘랐다. 한때는 내가 몸 바쳐 지키려 했던 울타리였지만, 실은 나를 갉아먹던 굴레였다. 나는 딸이기를 멈췄다. 언니의 동생도, 집안의 기대도, 모두 내려놓았다. 그리고 홀로 섰다. 외로웠다. 그러나 자유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쉽게 다물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문득문득, 내 안에서 부유하는 질문들이 있다. '왜였을까', '어째서 나였을까'. 나는 그 물음들 앞에서 여전히 흔들리며, 나를 다독이는 법을 배워간다. 잊는 것이 아니라, 껴안고 사는 것이다. 상처를 덮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꽃을 심는 것이다.

나는 이제 안다. 헛되다고 여겼던 모든 순간에도, 나는 존재하고 있었다. 쓰러지지 않았고,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그 고통을 통과하며 태어난 또 다른 나다.

더는 무의미한 헌신으로 나를 지우지 않겠다. 나는 나의 시간을 나를 위해 살 것이다. 누군가의 기대가 아니라, 나의 진심에 기대어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나는 조용히 다짐한다.

"이제는, 나를 잃지 않겠다."

제2장 – 조용한 치유의 시간

모든 관계를 끊고 돌아선 뒤, 삶은 유난히 조용해졌다. 전화는 오지 않았고, 명절에도 찾아오는 이 하나 없었다. 마치 나의 존재가 지워진 듯한 적막함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다. 배신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적막과 울분, 그리고 나를 닮은 낯선 외로움이었다.

처음엔 그 침묵이 괴로웠다. 누군가의 목소리로 마음을 덮고 싶었고, 익숙한 일상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곳이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는 거울 속의 나를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울고 싶을 땐 울고, 미워질 땐 미워하며, 조금씩 감정을 끌어안았다. 그건 회복이라기보다, 감정의 감옥에서 벽돌 하나씩을 허무는 일이었다.

치유는 거창한 사건이 아니었다. 아주 사소한 순간들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되찾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며 "괜찮아"라고 중얼거리는 것, 서랍 깊숙이 숨겨뒀던 스케치북을 꺼내 그림을 다시 그려보는 것, 걷기 좋은 오후에


제3장 – 나를 그리는 삶

고요한 치유의 시간이 지나자, 나는 빈 종이 앞에 섰다. 더는 누구의 그림자도, 기대도, 상처도 담지 않은 나만의 생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인생의 진짜 시작은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잃은 것이 많았기에, 무엇이 소중한지를 더 뚜렷이 알게 되었고, 나 자신을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도 예민해졌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네가 진짜 원하는 삶은 무엇이냐.”

그 질문 끝에 나는 다시 일했다. 쉼 없이, 집요하게, 나만의 방향으로. 스물여섯, 마침내 손에 쥔 2억 원은 내가 만든 첫 번째 걸작이었다. 그 돈은 단지 숫자가 아니라, 상처 위에 피어난 자존심의 첫 꽃이었다. 나는 그 자금으로 투자했고, 실패보다 통찰을 택했다. 남들이 머뭇거릴 때, 나는 한 발 먼저 움직였고, 누군가는 허황되다 말릴 때 나는 직감과 분석으로 돌파했다.

나는 부동산을 보는 눈을 가졌다. 그건 단순한 감이 아니었다. 수많은 밤, 수치와 시장 흐름, 사람의 심리를 공부하고 또 읽은 끝에 얻어낸 것이었다. 남의 시선을 내려놓자,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른다섯이 되기 전에, 나는 40억대의 건물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내 삶에서 가장 빛나는 건, 단지 부동산이 아니었다.

그 성공의 중심에는 늘 ‘나’라는 사람의 복원이 있었다.

돈은 삶의 도구였지, 내가 되는 방식이 아니었다.

나는 그 돈으로 나만의 작업실을 만들었고,

묵혀두었던 물감과 붓을 꺼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캔버스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누구의 딸도, 동생도, 희생도 아니었다.

오로지 나 자신이었다.

지금도 나는 삶을 그린다.

한때는 눈물로 번진 선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확신과 평온의 색으로 채워지고 있다.

가장 소중한 그림은, 결국 나를 다시 완성해 가는 과정이었다.멋진 그림의 탄생을 기대하며 오늘도 나는 힘차게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