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호텔 그리고 ……
나는 자주 꿈을 꿨다. 누군가 나를 뒤쫓고 있었고, 나는 늘 어떤 작고 단단한 금고를 품에 안고 도망치고 있었다. 땀에 젖은 채 깨어나면 그 꿈이 너무도 선명해서, 마치 현실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침 햇살이 방 안에 스며들면, 그건 단지 꿈이려니 하고 애써 잊었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나는 그 꿈을 반복해서 꿨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예지몽은 현실의 문을 열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2020년 5월, 상하이를 떠나던 날의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다. 코로나는 이제 막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나는 일종의 예감을 안고 있었다. 모든 것이 곧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2월 초에 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3년 치 은행 금고 사용료를 한꺼번에 지불하고 상하이를 떠났다. 단지 안도감을 얻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 선택이 내게 어떤 시간을 가져다줄지는 알지 못했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코로나는 예상보다 훨씬 길게, 깊게, 세상을 붙잡았다. 중국의 방역은 더 엄격해졌고, 입국 절차는 ‘14+7’ 격리, 혹은 ‘5+3’ 자가 격리로 계속 바뀌었다. 나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점점, 마음은 조여왔다. 3년 치 금고 비용이 다 되어가는 2022년 겨울, 불현듯 꿈이 더 자주 찾아왔다. 나는 또다시 금고를 들고 도망치고 있었다.
2022년 11월, 어렵게 은행과의 연결이 닿았다. 나는 애타게 물었다. “친구가 대신 금고 비용을 낼 수 있나요?” 돌아온 대답은 냉정했다. “본인이 직접 오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혹시 제 계좌에서 자동이체는 안 되나요?”
“죄송하지만 그것도 불가합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문장이 있었다. 금고를 열지 못하고 렌트비를 연체하면, 은행은 금고를 강제로 개봉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손해는 고객의 책임이라는 계약서의 조항. 그리고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이유 없이 반복되던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건 예지몽이었다. 내 무의식이 오래전부터 경고해 왔던 것이다.
나는 무서웠다. 단지 물건이 아니라, 그 속엔 내 과거, 내 신뢰, 내 정체성의 조각들이 있었다. 그것이 무너지는 꿈을, 나는 미리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온통 금고 생각뿐이었다. 상하이의 한 귀퉁이, 어두운 지하실 안에 놓여 있을 그 작고 묵직한 상자. 그것은 단순한 보관함이 아니었다. 내가 쌓아온 시간, 관계,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긴, 일종의 과거의 사서함이었다.
2023년 2월 5일. 그 날짜는 내게 시한폭탄처럼 다가왔다. 나는 날마다 달력을 보며, 한 장 한 장 종이를 떼어내듯 시간을 지워갔다. 싱가포르 서 보낸 나날은 평온한 듯 보였지만, 속은 점점 텅 비어갔다. 마음속엔 늘 경고음이 울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는 가야만 한다.’
결국 나는 결심했다. 돌아가기로.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복잡한 중국 입국 절차를 다시 공부하고, "좋은 격리 호텔을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면서. 서류를 하나하나 준비할 때마다 손이 떨렸다. ‘혹시라도 너무 늦은 건 아닐까?’ 금고는, 아직 거기 있을까?
그렇게 2022년의 12월 초 나는 차가운 바람을 뚫고 나는 썬전에 도착했다. 공항은 낯설 만큼 조용했고, 흰 방역옷을 을 입은 방역 요원들이 마치 전쟁터의 병사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한 명의 ‘귀환자’로, 말없이 줄을 섰다.
격리호텔에서 보낸 다섯 날의 기록
만단의 준비와 낯선 감옥 속 사람들
공항에 내리던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싸움이라고.
입국 절차, 코로나 검사, 짐 검사, 또 다른 검사... 총 네 시간이 걸렸다. 그 후에야 격리 호텔로 향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준비되어 있었다. 아주 철저히.
평소 식성이 까다로운 나는, 싱가포르의 한인마트를 뒤져가며 현미 요구르트 파우더와 현미 누룽지 파우더를 열 봉지나 챙겼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억제한다는 목과 코 스프레이도 몇 개 준비했고, 혹시 모를 위생 문제에 대비해 침대커버, 베갯잇, 이불 등 침구 세 세트와 샤워 티슈까지 꼼꼼히 챙겼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그때의 나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어쩌면 그 모든 준비는 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호텔 방에 도착하기도 전에, 같은 비행기 편을 탄 이들이 한 격리호텔로 배정되었고, 곧바로 ‘위챗 격리 그룹’이 만들어졌다. 질문이 올라오면 누군가 답을 달았고, 모두는 그 채팅방에서 문제를 해결하며 고립된 시간을 버텨냈다.
나는 가져온 파우더 덕분에 호텔 음식은 손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도시락 하나가 우리 모두를 혼란에 빠뜨렸다. 마지막에 배달된 도시락 뚜껑을 열자, 채소안 에 거대한 곤충이 축 늘어진 째로 있었다. 이미 도시락을 다 먹은 사람들은 충격에 울부짖었고, 채팅방은 항의와 분노로 가득 찼다. 소동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격리 5일째 되는 오후, 방호복을 입은 격리 담당자들이 내 방 문을 두드렸다. 검체를 채취한 후 돌아설 줄 알았건만, 리모컨과 베갯잇을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매일 알코올로 내가 자주 사용하는 리모컨과 티테블을 직접소독하 했기에 기꺼이 내줬다. 그들이 베갯잇과 리모컨을 면봉으로 표면을 쓰윽 닦아가며 기록하는 손길을 보며 문득,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날 밤, 또 한 번의 소동이 일어났다. 같은 비행기를 탔던 이들 중 두 명의 리모컨과 베개에서 병균이 검출되었다는 통보가 떨어진 것이다. 그들은 더 열악한 집중관리센터로 이송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무사히 썬전에서 상하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그날 밤 방을 옮겨야 했던 두 사람의 얼굴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그들은 무사할까.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공간에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고,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켰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준비는 삶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는 것을.
며칠 뒤, 격리가 끝나자마자 나는 상하이행 비행기로 간신히 상하이로 도착해서 곧장 은행으로 달려갔다.
지하 금고실 문이 열리는 그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어두운 조명 아래, 작은 번호표가 붙은 금고들이 줄지어 있었다. 은행 직원이 내 금고 앞에 멈춰 섰다. 손에 쥔 열쇠를 삽입하고 돌리는 소리가 마치 심장의 박동처럼 또렷하게 들려왔다.
딸깍.
금고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내 시간의 조각들을 다시 마주했다. 꿈속에서 그토록 움켜쥐고 달아나던, 그 보석함, 부동산등기등본, 사진, 내가 수집했던 명품시계, 엄마가 나한테 준 귀금속액세서리. 그리고 내가 수집했던 몇 점의 고가의 미술품은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주저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내가 왜 그토록 도망치고 있었는지, 왜 그 예지몽이 내게 반복되었는지, 왜 내 무의식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는지.
그건 단지 물건 때문이 아니었다.
격리 호텔을 체크 아웃 할 때 나는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
왔다. 오랜 기간 출장 중에 길들여진 나 만의 논리자 습관이다. 격리 같은 일은 내 인생에 더 없기를 비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