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지 않아도 피어나는 꽃

by 지로 Giro


반평생, 나는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웃었고, 관계를 해치지 않기 위해 말끝을 삼켰다. 그러다 가끔은 문득, 너무 바보같이 살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대 말, 한 사모님이 나를 유독 예뻐해 주셨다. 미술을 사랑하던 분이었고, 시간이 날 때면 나를 종종 갤러리에 데려가셨다. 덕분에 나는 많은 그림을 보고, 보는 눈도 조금은 자랐다. 하지만 바쁜 회사 일과 겹치다 보면 그 만남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어느 주말, 나는 회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느라 지쳐 있었다. 간만에 꿀잠을 자고 싶은 날이었다. 그래서 사모님의 연락에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회피였다. 하지만 운명은 꼭 그런 날, 엉뚱한 장난을 친다.


늦잠에서 깨어나자 핸드폰엔 상사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다음 주에 급히 상가 프로젝트를 준비해야 한다는 통보. 나는 부랴부랴 머리를 묶고 현장 조사를 나갔다. 한 시간 반쯤 리서치를 하고 땀이 흥건히 밴 채로 커피숍에 들어가 아이스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지로 씨, 아픈 사람이 왜 돌아다니고 있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곱게 차려입은 사모님이 내 앞에 서 계셨다. 오늘도 그림 쇼핑을 하러 나오신 모양이었다.


“일이 좀 생겨서요…”


“됐어. 거짓말은 그만해. 싫으면 싫다고 하지.”


그렇게, 한바탕 찬바람이 지나갔다.


나는 억울한 마음을 달래지도 못한 채 남은 리서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뒤, 사모님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 오늘 되게 섭섭했어. 거짓말하는 사람, 난 정말 싫어해.”


그 순간, 나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도대체 나는 왜 내 시간 하나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걸까? 주말에 억지로 나간 리서치도 서러운데, 왜 나는 '싫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을까?


그날 이후, 24년이 흘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내가 바라던 것은 이해가 아니었다. 거절을 슬기롭게 하지 못한 내 자신에 대한 용서였다. 그때는 몰랐다. 꽃이 피기 위해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의 기분에 휘둘려서가 아니라, 내 삶의 리듬에 따라 피어나는 꽃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나를 지키는 일은, 때로는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용기를 수반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해받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이미, 피어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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