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몸이 아닌 마음이 먼저 피곤해지는 때가 있다.
책상 위에 쌓인 일 때문도,
사람 사이의 작은 균열 때문도 아니고,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무게가
등허리에 조용히 걸터앉는 듯한 날.
그럴 때 나는 내가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
잠시 들여다보게 된다.
손바닥을 펼쳐보면
사실 아무것도 없는데,
마음은 늘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이미 지나간 말,
돌아오지 않을 표정,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의 기척.
잡히지 않는 것들만 골라
더 세게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 문장이 책 속에서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놓는 것은 비워내는 게 아니라,
제 자리에 돌려놓는 일이다.”
어쩌면 ‘놓지 못함’은 미련이 아니라
두려움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잃어버릴까 봐,
쓸모없어질까 봐,
나만 홀로 남게 될까 봐
불안이 마음의 가장자리에서 빛을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고.
타인의 마음은 문이 없는 방처럼 닫혀 있고,
과거는 이미 굳어버린 흙처럼
손가락으로 다시 빚을 수 없다고.
오지 않은 미래는
우리 언어가 닿지 않는 먼 바다 같아서
예측할수록 더 멀어질 뿐이라고.
그렇다면 붙잡던 것들을
한 번쯤 그 자리에 놓아두어도 좋지 않을까.
마음 한가운데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저 더 이상
우리의 감정을 점유하지 못하도록
빗장을 내려두는 일.
그렇게 놓아주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은 흔들리지 않았고,
나는 갑자기 강해지지도 않았다.
다만,
오래 잠겨 있던 창문이
서서히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공기가 바뀌었다.
그 작은 변화 하나로
오늘이 어제보다 조금 더 살 만해졌다.
비교는 마음의 체온을 빼앗는다.
혼자가 두렵다는 건 아직 나를 덜 만났다는 뜻이다.
후회는 뒤를 향한 응시지만, 점검은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이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지나가야만 한다.
나는 그 말들 앞에서
마치 누군가 내 어깨 위에 얹힌 먼지를
가만히 털어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삶은 원래 늘 불확실하고,
불완전하고,
불친절하다.
그러나 우리가 붙잡지 않는 순간부터
그 불완전함은
우리에게 상처 대신 여백을 건네기 시작한다.
여백이 생기면
빛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빛은
“괜찮다”는 말을 오래도록 속삭인다.
오늘도 나는
과거의 조각 몇 개,
미래의 그림자 몇 점을
조용히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그 빈자리에서
비로소 숨이 쉬어진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아갈 힘을 다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