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by 지로 Giro

엄마의 기억이 천천히 지워지고 있다.
마치 오래된 필름이 햇빛에 바래듯,
또박또박 적혀 있던 이름들이
조금씩 흐릿해진다.
여든둘의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가끔 묻는다.
엄마는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뒤로 미루며 살았을까.
엄마의 삶은
늘 마지막 줄에 적혀 있었다.
식탁에서도, 꿈에서도, 계획에서도
엄마는 맨 끝에 앉아 있었다.
가족이 다 먹고 난 뒤에야
천천히 숟가락을 들던 사람.
자신의 몫은 늘 남은 자리였다.
나는 타임머신을 상상한다.
시간을 거슬러
스물다섯의 엄마 앞에 서는 장면을.
“엄마,
조금 더 이기적이어도 돼요.
조금 더 당신을 먼저 사랑해도 돼요.”
그 말을
젊은 엄마의 손에 쥐여주고 싶다.
그러나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나는 그저
엄마의 노화를 옆에서 지켜보는
딸로 서 있다.
아직 예순이 되지 않았지만
나는 먼 훗날의 나를 자주 상상한다.
주름은 깊어지더라도
마음은 가벼운 사람.
걸음은 느려지더라도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
우리는 나이를 숫자로 세지만
삶은 무게로 쌓인다.
엄마의 어깨에는
기쁨의 무게보다
책임의 무게가 더 많이 얹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제 기억이 옅어지는 모습이
마치 평생 짊어졌던 짐을
조금씩 내려놓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은퇴는 퇴장이 아니라
짐을 내려놓는 의식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치매로 흐려지는 기억조차
혹시 신이 허락한
마지막 휴식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엄마의 삶을 다시 설계해 줄 수는 없지만
나는 나의 삶을 다시 설계할 수 있다.
봄처럼 증명하려 애쓰지 않고,
여름처럼 타오르다 지치지 않고,
가을처럼
스스로를 수확하는 삶.
엄마가 끝내 살지 못했던
조금은 이기적인 인생을
나는 대신 살아보고 싶다.
남의 시선보다 내 마음을 먼저 묻고,
불안보다 설렘을 선택하고,
“이제 나이가 있으니까”라는 말 대신
“아직 살아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사람.
여든둘의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미래의 나를 배운다.
타임머신은 없지만
한 가지는 가능하다.
엄마의 어제를 후회하는 대신
나의 오늘을 바꾸는 일.
언젠가 거울 속의 내가
엄마를 닮은 얼굴로 웃으며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엄마,
나는 당신보다
조금 더 나를 사랑하며 살았어요.
그래서
당신의 삶도
헛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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