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연필깎이 앞에서

by 지로 Giro

작은 공주님이 국제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주말의 한가운데, 담임 선생님에게서 다급한 메시지를 받았다.


"금요일 수업 시간, 따님이 친구의 손가락을 연필깎이에 넣어 다치게 했습니다. 손톱이 잘리고 크게 상했습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썼다.

"병원비는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혹시 사진을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예 사진을 보내겠습니다!"

하지만 사진은 그 뒤에 흐지부지 해 버렸다.지금 생각 하면 사진 자체가 존재 하지 않았을까?


그날 이후 나는 아이를 다그치지 않았다.

둘째는 예민한 아이라,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조용히 물어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금요일에 무슨 일이 있었니?"

"선생님한테 혼났어요. 근데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이의 대답은 어리둥절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주말을 넘기고, 월요일 아침 직접 학교를 찾았다.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의무실.


“혹시 금요일에 손가락을 크게 다친 아이가 있었나요?”

두 간호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없었는데요.”


“Y1 반은요?”

“아, 그 반! 손가락에 약간 긁힌 상처였어요. 소독할 때 거즈에 피가 살짝 묻은 정도였어요. 밴드도 붙일 필요 없었고요.”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 아이의 반으로 향했다.

담임 선생님께 먼저 피해 학생을 만나보자고 요청했다. 사과도 하고, 같은 반 친구로 잘 지내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잠시 후, 문 앞에 선 그 아이의 손가락은

손톱 끝이 살짝 잘려 있었지만, 밴드조차 붙이지 않은 채였다.


나는 내 아이에게 사과하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날의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몇 달 뒤, 운전 중이던 어느 날.

아이들이 뒷좌석에서 선생님 얘기를 하며 깔깔거렸다.

그러다 조용해진 작은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 그날 나한테 사과하라고 했던 거 기억나요? 나 사실 진짜 억울했어요.”


나는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 아이는 항상 내 친구들이랑 못 놀게 했어요. 그날도 내가 친한 친구랑 놀고 있었는데,

자기랑만 놀아야 한다고 화내면서 밀쳤어요. 그러다 씩씩 거리면서 자기가 연필깎이를 쓰다 그렇게 된 거예요.그 아이가 바보라고 손가락을 내주면서 연필깍이에 돌리라고 하겠어요?……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근데 엄마, 고마웠어요. 저한테 따지지 않고 그냥 사과만 하라고 해서…”



그 아이에게는 단순한 다툼이었을지 몰라도,

내 아이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어버렸다.


그 뒤로 알게 된 이야기들도 있다.

학교 봉사를 자주 다니는 친구가 들려준 소문이었다.


“그 아이, 선생님이 있을 땐 바닥까지 닦으며 모범생인 척하다가,

선생님이 안 계시면 쓰레기를 막 버리고, 나중에 딴 애한테 뒤집어씌우는거 보고 내가 몇번 이야기했어 그러면 안된다고 .진짜 여우 같아. 다섯 살인데도 계산적이야.”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내가 지켜야 할 것은 아이의 손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이었다.


잘못한 일이 있다면 사과하는 법을 가르쳐야겠지만,

억울한 마음을 혼자 삭이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날의 억울함은 아이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이 상처를 어떻게 풀어줘야 할까.

어떻게 해야 아이가 이 일을 기억할 때,

‘나는 억울했지만, 엄마가 내 편이 되어줬어.’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직 풀지 못한 숙제처럼, 그날의 기억은 마음 한 켠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래서 이 글을 남긴다.

언젠가 이 이야기가 내 아이의 마음에 남은 매듭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풀어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