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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렌의 가을 Dec 29. 2017

가시

때로 나 혼자서는 빼낼 수 없는


일을 마치면 그때서야 배고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글을 쓸 때에는 한참 일에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을 때도 있다. 그런 날은 일이 끝남과 동시에, 순식간에 기진맥진해진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혼자 저녁을 먹는 날이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생선을 굽고 찌개를 끓였다.      


마침 <나 혼자 산다>를 보며, 나름 혼자서도 잘 챙겨 먹은, 괜찮은 저녁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목을 콕콕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며 급하게 먹은 생선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곧바로 ‘가시가 걸렸을 때’를 검색했다. 맨밥을 한 숟가락 먹어보라거나 따뜻한 물을 마시라는 등의 조언을 따라 해보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게다가 잘못하면 가시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 상태가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했다.      


혹시 뭔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그가 집에 돌아올 시간에 맞추어 손전등 애플리케이션을 휴대폰에 열어놓고 LED 손전등도 준비해 놓았다. 있는 힘껏 입을 벌린 내 앞에서 그는 ‘와, 이렇게 보니 에일리언(alien, 영화 속의 외계 생물체) 같아!’라며 목 속을 들여다보고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라고 난처해할 뿐이었다.

이미 밤늦은 시간이었다. 목이 부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보통의 경우면 침에 삭아 없어질 수 있다는 정보에 나는 일단 그날 밤을 넘겨보기로 했다. 상황을 보아 아침 일찍 병원을 갈 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가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았겠으나 그렇지 않았다. 목은 더 부어있었고 얼굴은 푸석푸석했다. 곧바로 병원으로 갔다. 이런 일로 병원에 가다니 어쩐지 좀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환자 대기실에서 나는 한 젊은 뮤지션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의사가 물었다. 그는 환자기록을 재빨리 처리하기 위해 두 손을 키보드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제가 어제저녁 생선을 먹었는데, 가시가 ….”라는 나의 서두에 그가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는 굳이 그것을 소리 내어 따라 하며 컴퓨터 기록 창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우스꽝스러운 사건을 취조당하는 것 같았다. “그게 어디에 있는 것 같아요? 오른쪽? 왼쪽?” 침을 요리조리 삼켜 보았지만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잘 모르겠는데…, 그냥 가운데 같기도 하고….” 나는 답했다. “흠. 가운데.” 그가 말했다. 내 안의 일을 내가 모르는 것이 어딘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어딘지는 모른다.” 그는 반복하더니 그것 또한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뭐 먹었어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고등어요.”라는 나의 대답에 “그렇다면 크지는 않겠군요.”라는 그를 보며 ‘폭넓은 지식은 역시 다양한 일에 도움이 되는구나. 이비인후과 의사에게 해양지식도 필요하다니’하고 새삼 감탄했음을 밝혀두어야겠다.     


나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두 손에 거즈를 댄 채 혀를 길게 뺐다. “에- 하고 길게 소리 내세요.”그가 말했다. 내가 음이탈을 방불케 하며 소리 내고 있을 때 그는 내시경으로 목구멍을 비추더니 순간 잽싸게 움직여 무언가를 쏙 빼냈다. 그는 정보를 종합하여 가시의 종류와 크기, 위치를 예상한 후, 적절한 기기를 사용해 그것을 추적하고, 한 번에, 정확하게 가시를 빼냈다. 정말, 쏙!


"됐네요."라는 그의 말에 나는 침을 삼켜보았다. 안 아팠다! 걸리는 것이 사라졌다. 순간 듯이 기뻤다. "자, 이건 가져가시고." 그가 건넨 거즈 위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투명한 빛의 구부러진 가시가 놓여 있었다. 내 편도선이 그야말로 낚였던 것이다. 목 깊숙이, 편도 오른쪽(굳이 말하자면 중앙에 가까운)에 이게 박혀 있었다고 했다. 의사는 한 마디 더 보탰다. "약 처방은 없습니다. 다음번에는 잘 발라드세요."        




병원 밖으로 나오는 길, 그날의 한파도 나쁘지 않았다. 이 작은 가시 하나 때문에 잠을 설쳤던 어젯밤이 떠올랐다. 가시가 분명히 있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고 보여줄 수 없으니 너무나 답답했다. 이야기를 들은 가족들마저 의심 반인 것 같았다. “정말 가시가 있긴 한 거야?” “그냥 긁힌 거 아니야?”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분명히 느껴지는데 그것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급기야 나는 나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괜히 예민한 거 아닐까?’ ‘나만 이런 건가?’ ‘정말 가시가 걸리기는 한 건가?’     


그것은 나만 아는 고통이었다. 아팠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남들 눈에는 시시해 보였을 고통. 가시가 목에 걸리니 말로 설명하기도 불가능했다. 말을 할 때마다 성대가 움직이고 그게 가시를 움직여 목을 찔러댔다. ‘말할 수가 없네요.’라고 말하기도 불가능한 고통. 말하면 할수록 커지는 통증. 내 작아지는 목소리에 상대는 사정을 모른 채 ‘안 들려. 크게 말해 줘.’라고 말한다. 그럴수록 대화는 불가능했다. 내 안에 가시가 있다고, 아프다고, 설득할 힘도 점점 빠져갔다. 그러자 잠에 들고 싶었지만 그나마도 목이 경직되고 열이 나 쉽지 않았다.

     

타인이 나의 가시를 처음으로 봐주었을 때 얼마나 시원하던지! 그것은 나의 고통을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할 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의미였다. 먹는 것은 혼자 할 수 있었지만 빼내는 것은 혼자 할 수 없었기에. 깊은 곳에 박혀 있을수록 더더욱.


오늘도 깊은 바닷속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태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생선을 먹는다. 누구나 가시가 걸릴 수 있고 그것의 크기와 굵기, 박힌 위치, 어떤 방향인가에 따라 그 아픔의 정도는 무한의 가능성으로 달라진다. ‘그깟 가시 하나인데' 라며 남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말할 수도 있는 아픔. 그 말에 본인은 더 바보같이 느끼고, 그것으로 인해 남몰래 괴로워지는.      




타인은 나의 고통을 모를 수 있다. 그 고통이 표현되지 않을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나는 반쯤 흘려듣는다. 때로 그 말에 공감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일반화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아주 단순하게, 나는 거울이라는 외부의 대상 없이 나를 볼 수 없다. 게다가 거울 속의 나는 나 자신에게 드러내는, 또 다른 버전의 나일 수도 있다. 나는 고독을 귀히 여기지만 그만큼이나 타자와의 만남, 예고 없는 상황들, 삶의 경험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려 노력한다. 그 앞에서 나는 침착히 대처하기도 당황하기도 허둥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만의 방 안에서 스스로를 안심시킬 가공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것보다, 가능하다면 타인들과의 세계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지 지켜보고 싶다.

     

'아이도 아니고, 생선 먹다 가시가 걸리다니.' 나는 자책했지만 살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 중 하나였다. 그 어쩔 수 없이 비밀스러웠던 고통, 가시와 이별하고 나니 스스로 조금은 바보같이 느껴지면서도 한없이 시원해졌다. 비로소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차 안의 스테레오를 다시 켜 음악을 듣고, 다시 무언가를 하고 싶어졌다. 음식의 맛을 느끼고, 좋은 향을 맡고 싶어졌다. 그 무엇보다 다시 수월히 말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가시가 박힌 후 열이 났던 것 같다는 나의 말에 의사는 열의 원인이 가시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가시가 빠진 흥분에 반쯤 정신을 잃고 진료실을 빠져나온 나를 위해 - 의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 앳된 얼굴의 간호사는 온도계를 든 채 뛰쳐나왔다. 감사했다. 머리카락을 넘기자 그녀가 내 귀에 온도계를 살며시 넣었다 뺐다. "36.8도. 정상 범주입니다." 그녀가 말해 주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설마 하던 나는 세상을 떠난 그가 내가 무척 좋아하던 노랫말을 쓴 이임을 알았다. 우연히 그 노래를 듣고 나서 작사가가 누구인지 찾아보았었다.

그의 어딘가에도 가시가 있었던 것일까. 깊이 박혀 있었을 그 가시를 누군가 빼 주었다면. 운 좋게 빠져나올 수 있는 가시였다면. 그의 가시는 목의 가시와는 비할 수 없이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이토록 살아있는 감각을 가진 사람에게, 깊숙이 꽂힌 가시가 있었다면,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까. 그러나 곧이어, 가시 박혀 본 사람이라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러워졌다.


나는 볼륨을 높이고 그의 음악을 듣는 일에 집중했다. 노래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얼어붙은 겨울길에 빛이 쏟아지고 세상은 쉴 새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후기: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故종현 님이 편안하시길 빕니다.


bitterSweet life + music

text by 엘렌의 가을

title photography thanks to Francisco de Legarr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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