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 무렵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커피가 마시고 싶어 물을 끓인다. 깨끗한 거실을 바라본다. 그가 일본 출장에서 사 온 작은 산타 장식물과 ‘merry christmas’라고 쓰인 뜨개질 와인 커버, 또 다른 손님이 가져다준 금색 장식의 스파클링 와인, 매트가 없어 대신 빨간색 목도리를 깔고 음식을 차렸던 긴 나무 의자가 한편에 있다. 커튼이 달리지 않은 커튼 고리에는 붉은색의 커다란 벨벳 양말과 체크무늬 리본의 작은 종, 둥근 크리스마스 리스가 걸렸다. 몇몇 장식물들은 내가 혼자 살 때부터 쓰던 것이니까 벌써 십 년이 넘은 것들이다. 내가 거쳐 간 집들을 이 장식물들도 함께 거쳐 갔다. 선물로 받은 것도 있다. 한때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준 것들. 지금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는 알지 못한다.
12월의 시간은 빨간 상자에 담겨 오는 것만 같다. 연말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깜빡이는 붉은 불빛처럼 마음을 재촉한다. 멀어졌던 사람들과 연락이 오가고 만날 날짜들이 정해진다. 한 해의 시간이 머릿속에서 되감아진다. 또 한 살 나이가 들고 그 숫자에 새삼 놀라기도 한다. 미뤄두었던 일들을 연말까지는 마쳐야 할 것만 같다.
모임 다음 날의 아침, 무심결에 바라본 거울 속 내 얼굴은 정직하다. 막 어딘가에 불시착한 것만 같은 기분.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어제를 떠올린다. 그래, 사람들이 왔었지. 집을 채우던 음식 냄새, 그들의 말소리, 옷의 색깔과 무늬, 노랫소리... 그 모든 것들은 밤 사이 창문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문득 몸을 움직여,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늘리려 잠시 옮겨두었던 의자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둔다. 구석에 보이지 않게 두었던 자잘한 물건들도 다시 꺼내어 내놓는다.
어딘지 모르게 사람들이 지나간 공간은 그 전과 느낌이 다르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머물렀던 자리. 누구나 가졌을 나름의 슬픔들은 잠시 미뤄두고 기쁨에 집중했던 시간. 크지 않은 곳이지만 손님들을 초대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감사한 일이다. 무엇보다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그들과 때를 맞추어 음식을 나누어 먹고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욕실에서 손을 씻다 무언가 낯선 느낌에 문득 쳐다보니 내가 늘 가로로 두는 비누가 세로로 놓여 있다. 홀쭉한 얼굴같아 피식, 하고 웃음이 난다. 사람들은 잠시 왔다 머물고 떠나며 그들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을 작은 흔적들을 이렇게 남겨두고 간다. 주는 사람도 놓고 가는지 모를 이 작은 무형의 선물들. 그것은 늘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던 삶의 방식에 약간의 트위스트를 더한다. 익숙했던 습관과 사고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때로 신선하게 하고, 상상치 못한 순간의 작은 웃음을 전한다.
어쩌면 모임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란, 그것이 모두 끝나고 난 뒤 혼자 남았을 때가 아닐까. 이제 지난날이 되어버린 어제의 만남, 한 해가 끝나가는 무렵... 그럴 때면 나는, 시간이 지나가는 나지막한 소리를 듣는 것만 같다. 그가 옷자락을 끌고 스르륵하며 지나가는 소리.
더 되지도 덜 되지도 않은 그런대로의 날들이 하염없이 흘러간다. 때맞춰 내리는 눈, 비, 혹은 다른 무엇. 나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