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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브 Oct 17. 2021

별거 없는 주제에, 아둥바둥 사는 주제에, 왜 너는

안경과장의 아내 경은 12편

 

경은은 자그마한 샤넬 가방에서 아르마니 쿠션을 꺼냈다. 조심스레 화장을 고치고 얼마 전 현대백화점에서 아침부터 줄 서서 구매한 신상 립스틱을 덧 발랐다.  


나도 선크림이라도 발라야겠다. 요즘 햇빛 장난 아니네.”


선크림에 연한 립글로스만 바른 말간 얼굴이다. 경은은 가방에서 선쿠션을 꺼내 얼굴에 두들기는 미정을 바라보았다.


대체 왜? 내가 갖지 못한 목걸이를 너는 살 수 있을까? 돈이 어디서 나서? 남편이 어디 투자를 한 걸까? 유산이라도 미리 받은 걸까? 얘네 시댁이 잘 살았던가?

경은이 보기에 미정은 평소에 아둥바둥 사느라 언제나 궁상으로 보였었다. 그런데 가만 보면 또 원하는 걸 손쉽게 손에 넣는 것 같았다. 정작 미정은 그닥 원하지도 않는데, 경은 자신과 비교했을 때 별것도 없는 주제에 인생이 술술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가정적이고 자상한 남편에 똘똘한 아들, 또 직장에서는 얼마전에 팀장까지 달았다고 했다. 그런데 경은이 주로 쓰는 단식투쟁 없이도 남편에게 명품 목걸이까지 받았다.


하지만 경은은 미정과 그녀의 남편이 아침저녁으로 동동거리며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아이를 맡기려고 여기저기 종종거리는 건 생각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욕먹고 업무 스트레스로 위염을 달고 살며, 아이를 재운 후에 진급시험 준비를 하느라 밤 늦게까지 공부했다는 것도 전혀 기억하지 않았다.


'별거 없는 주제에, 아둥바둥 사는 주제에..
넌 왜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을 모두 손쉽게 갖는거야?'


이런저런 상념들로 경은의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제 들어가자. 나 머리가 좀 아프다.”


얼굴빛이 좋지 않은 경은을 보며 미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집에 들어온 경은은 휘청휘청 안방 침대로 가 누웠다. 혼자 집에서 TV를 보고 있던 딸이 쪼르르 달려왔다.


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나 좀 무서웠어.”


무섭긴 뭐가 무서워, TV 잘만 보고 있더구먼.”


힝.. 아니야. 무서워서 방금 TV 튼 거야.”


“아, 몰라. 머리 아프니까 찡얼 대지 말고 가서 TV 봐.”


“...”


다 귀찮았다.

딸아이는 내성적이라 밖에 나가 노는 것보다 집구석에서 뒹굴거리며 자신을 귀찮게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아무리 나가 놀라고 등 떠밀어도 싫단다. 경은은 그게 불만이었다.


‘어휴.. 진짜 내 속에서 나왔지만 나랑 안 맞아..’

 

열린 방문 사이로 거실의 TV 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리 혼자 신났는지 깔깔 웃는 딸의 목소리도 들렸다.

나가기 전에 학원 숙제와 학습지를 해 놓으라고 말했지만 분명 하나도 안 하고 TV부터 틀었겠지. 영 공부머리가 없어 이것저것 욕심을 내 시켜봐도 흥미도 없고 따라와 주지도 못하는 딸이 답답했다.


돈 관리는 모두 안경과장이 하고 있어 경은은 집 재정 상태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저 현재 외제차를 몰고 호텔 뷔페에 가고 때 되면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철마다 명품 가방과 옷을 살 수 있는 걸 보아 자신의 계급이 어느 정도 중상위층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따로 노후준비를 하고 있지 않아 남편이 퇴직하면 이 생활수준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후에는 어떻게든 딸이 출세해야 자신의 남은 인생이 평탄할 터였다. 그런데 저렇게 안 따라주니 답답하기만 했다. 가끔은 아직 너무 어린가 싶다가도 주변을 보면 자신만 뒤쳐지는 것 같아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미정의 아들은 붙고 경은의 아이는 떨어진 그 영어학원은 애초에 자신이 소개해 준 곳이었다. 만만치 않은 가격인데도 동네 엄마들 사이에 유명한 곳이었다. 레벨테스트를 통과해야지만 다닐 수 있어 경은은 두 달 가까이 아이를 11시까지 붙잡고 시험 준비를 시켰다. 미리 ‘족보'를 얻어 달달 외우게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그때를 떠올리자 다시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경은은 덮고 있던 이불을 확 발로 차 걷었다.


환하게 웃던 미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아래로 반짝이던 목걸이도 함께 떠올렸다. 자그마한 블랙 펜던트. 몇 달 전부터 명품 전문 블로거가 추천한 그 목걸이와 신상 가방을 사고 싶어 끙끙 앓았었다. 그 제품이 TV에 나올 때마다 앓는 소릴 해봤지만 남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 필요한 건 잘만 사면서.’


결혼 전에는 경은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갖고 싶은 것을 지를 수 있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신상 가방을 샀고 항상 남들보다 좋은 것을 하고 다녔다. 그런데 이제는 가방 하나, 목걸이 하나에도 남편 눈치를 봐야 했다.


갑자기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너무 억울했다. 결혼 전에는 정말 이렇게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남편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안방 문을 여는 기척이 들리자 경은은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누가 봐도 설움에 복받쳐 우는 뒷모습이었다.


왜 그래?”


“.. 오랜만에 미정이랑 브런치 먹었는데… 결혼기념일이라… 가방 받았다고...”


목걸이는 이미 얼마 전에 사달라고 졸랐다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그래서 이미 같은 브랜드 팔찌를 몰래 질렀다. 다시 목걸이 얘기를 꺼내면 끝까지 듣지도 않고 화낼 것이 뻔하므로 경은은 가방으로 타깃을 바꿨다.


니가 가방이 왜 또 필요해? 어? 몇백만 원짜리 들고 어디 가는데? 애 유치원 갈 때? 마트? 동네 아줌마들이랑 브런치 먹을 때? 어?”


안경 과장은 안방 옷장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 안에 가득 들어있는 가방들을 죄다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이건 다 뭔데. 가방 아니고 비닐 봉다리들이냐? 이건 두 달 전에 샀고, 이건 이번 결혼기념일에 산거고! 이건 이번 봄에 산거잖아!”


“그 루이비통은 친구가 쓰던 거 준거야.”

거짓말이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서 샀다.


그리고 봄에 산 샤넬은 짝퉁이야. 100만 원도 안되게 산거라고!”


거짓말이다.

주부도 가능한 론을 받아 샀다. 거짓말이 들킬까 뜨끔한 경은은 남편이 더 따져 묻기 전에 얼른 말했다.


됐어! 그래~ 내 팔자가 이렇지 뭐! 나같이 복 없는 년은 누가 누가 쓰던 거나 들고 짭이나 들고 그런 거지.

미정이 년은 남편 잘 만나서 때마다 샤넬에 루이비통에 알아서 남편이 턱턱 안겨준가던데. 그리고 요리도 남편이 한다더라! 아주 미정이는 손하나 까딱 못하게 한대! 걘 전생에 무슨 복이 그렇게 많아서...”


에이씨!”


안경과장을 거칠게 욕을 하며 일어서더니 패딩 차림 그대로 밖으로 획 나갔다.


어디가, 밥도 안 먹고.”


“돈 벌러 간다!!”


쾅. 현관문이 닫혔다.

안방 문 사이로 빼꼼 딸이 눈치를 보며 서 있는 게 보였다.


‘쟨 하여간 눈치도 없어.. 다른 애들은 엄마가 기분 안 좋으면 조용히 알아서 뭐 챙겨 먹고 한다는데 쟨 누굴 닮아서.. 어휴.. 다 속 터져.. 하긴 남편복 없으면 자식복도 없다더니..’


경은은 이불을 도로 뒤집어쓰고 돌아 누웠다.

귀찮았다.  귀찮았다.


cover image: Photo by Hayley Seibe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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