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1885년, 레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책의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세 살 무렵 부모가 사라진 후 여러 사연으로 대학진학은 포기하고 일을 하러 나갔습니다. 그때의 제 삶이 서러웠나 봅니다. 나는 뭣하러 태어났을까? 왜 날 낳았을까? 그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서점에 갔고 마치 저에게
너는 무엇으로 살것인가
라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제목만 보고 덥석 집어 들었습니다.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책 때문이라기보다 그저 나를 연민하는 나 때문이었을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는 말이 있지요. 생각해 보면 튼튼한 동아줄도 아닌 가느다랗고 힘없는 실낱같은 마른 풀잎을 잡는 심정은 어떤 심정일까요? 아마도 그러한 심정으로 그 책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벌써 25년도 훨씬 넘은 이야기니 기억이 생생할 수는 없지만 잠시 내장 어느 한 부위가 욱신거리는 걸 보니 필시 아팠던 것 같습니다.
책 내용은 성서를 바탕으로 쓰인 종교서적이었습니다. 홀로 남겨진 나는 소속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종교를 가져보자 마음먹고 하느님을 아버지 삼고 마리아를 어머니 삼아 새 삶을 설계해 보기로 했습니다. 엘리사벳이라는 새로운 세례명도 받게 되면서 마음이 충만해져 갔습니다.
책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글의 제목을 짓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부모가 부부로 사는 모습을 본 경험이 없는 저는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 것인지 늘 과제였습니다. 나의 결혼 생활은 어떤 모습일까 두려움과 설렘이 있기도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결혼 후 15년은 행복했고 그 후는 불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요? 결혼생활에 대해 이렇게 회고합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얼마나 잘 맞는가 보다 다른 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가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대문호의 책 제목으로 익숙한 물음이기도 하지만, 언제 물어도 귀한 물음인 것 같습니다. 저는 매년 저에게 묻습니다. 무엇으로 살 것이며,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하여, 매년 계속 묻는 것은 현답을 찾고 싶기도 하지만 지금을 살고 있는 내용들을 점검하기 위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 에 대한 물음에 좋은 답변이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부부의 삶에는 어떤 물음이 어울릴까요? 하나의 사람으로 살다가 다른 한 사람을 만나 둘이 하나 됨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결코 같을 수는 없습니다. 각자 하나임을 인정해 주어야 무사히 둘이 합쳐 한 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한 팀이라는 가족공동체 안에서 배우자를 너무 친숙히 여긴 나머지 마치 나인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나에게 하듯 통제하고 막대합니다. 가장 친하면서도 어느 순간 멀어지기도 하는 관계, 이 무슨 어려운 관계 인가 싶습니다. 더욱이 부부의 문제는 오로지 둘 만 아는 비밀이라 타인의 참견도 매우 제한적입니다.
사람 중에 유일하게 1+1으로 살아가는 형식이 부부입니다. 부모, 형제, 자식 모두 각자의 개체지만 부부는 한 팀으로 간주합니다. 저는 작년 법인을 설립하여 대표가 되었고 배우자는 주주가 되었습니다. 법에서 정한 가상의 사람 “법인”이라는 인물 아래 우리는 근로자로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부는 4대 보험이 적용이 안된다고 합니다. 연말정산을 하는데도 부양가족으로 신청하면 대표 한 사람에게 귀속되어 한 번에 정리됩니다. 편리하면서도 서운한 일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 나올 때 혼자 나와 부부가 되면 둘이 살아가도록 약속됩니다. 물론 꼭 부부로 살지 않기도 합니다. 요즘은 비혼주의, 1인가구, 독거노인들도 많습니다. 사람 속에서 사람과 분리되어 있는 이름 같아서 쓸쓸함이 스치지만, 둘이라고 늘 좋은 것만은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들은 혼자라는 명제에서 쓸쓸함이 비쳐 그럴 수 있다 여겨지지만 부부는 둘이라는 명제임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이 스밀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밀이고 싶어 합니다.
이때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해지는 순간입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는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있었기에 추운 겨울 거리에 버려진 벌거벗은 천사를 구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신께서 주신 가장 큰 축복이며, 세상을 만든 뜻이라고 전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사랑을 실천하라는 신의 큰 뜻을 품고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의 실천은 인류애를 실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나라에 식량과 약품을 보내고 학교를 짓게 도와줍니다. 최소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여러 단체들이 도움을 줍니다. 사랑이 없다면 결코 실천되지 않을 일일지 모릅니다. 어느 각박한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는
내가 불우 이웃이다 나를 도와라
라며 불평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각박함은 사람을 궁지에 몰기도 합니다. 또한 이념의 차이로 전쟁을 일으키키도 합니다. 탐욕의 결과일 뿐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터지고 찢겨 나갑니다. 죽거나 죽이거나 하는 세상에 사랑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비록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지만 세계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평화를 염원합니다. 인류애는 참으로 위대 합니다.
부부도 때때로 전쟁 같은 삶을 살기도 합니다. 같이 죽자 할 때도 있습니다. 너는 틀리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나누지 않겠다. 이 또한 가치관의 차이 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도무지 사랑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으로도 살 수가 없는 사막 같은 곳이 되어버립니다. 모든 것들이 파괴되어 가는 전장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서져 버린 그곳에서는 더 이상 서로를 원하지 않게 됩니다. 젊은 시절 가슴 뛰게 사랑하며 열정을 퍼부었던 시절만 사랑이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다른 사랑을 찾기 위해 새 길로 떠납니다.
그러는 동안 또 다른 곳에서는 오던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부부도 있습니다. 지난날의 열정은 내 몸 어딘가에 세포로 존재합니다. 뜨겁게 불타오르던 정열의 젊은 날은 어딘가에 분명 아름답게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인 채로 그냥 두는 것입니다. 살아오며 함께 겪은 깊은 역사 안에서 뜨거웠다 차가웠다 했을 것이며, 가까워졌다가 멀어져 있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느 날은 편안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합니다.
오래된 부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니 특별히 가까워 지려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너무 멀어지면 돌아오는 길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적절한 거리에서 존재를 인식하면 됩니다. 늘 곁에 있는 사람으로 잊지 않으면 됩니다. 위험하지 않으면 그저 바라봐 줍니다. 배우자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해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싫어하는 걸 안 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비로소 부부는 안정감을 느끼고 편안해집니다. 엄마가 늘 그곳에 있어줄 것을 아는 아이의 믿음처럼 부부는 서로에게 안정애착을 경험합니다. 영국의 소아과의사 이자 정신분석학자로,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과 발달심리학(developmental psychology) 분야에 특히 영향을 주었던 도널드 위니컷(Donald Woods Winnicott, 1896.4.7 – 1971.1.25)의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처럼 애써 주려고도 하지 않고 애써 달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늘 그곳에 있습니다. 적절히 다가오고 다가가면 됩니다. 이렇게 충분히 좋은 부부(Good enough married couple)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처음 만난 날의 우리의 시작이 정열로 시작하는 것은 부부로 살기 위한 동기부여입니다. 이는 인류애를 위함이기도 합니다. 세월은 많은 것들을 변하게 하고 바꿔주며 부부를 성숙시켜 줍니다. 오랜 세월을 지낸 부부의 사랑은 지루하리만치 잔잔하지만 안전합니다. 또한 그것은 극복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함이고, 걱정해 줌이고, 챙겨줌일 것입니다. 따뜻한 함께함이며, 협력하는 선입니다. 그리고 다름을 수용하고 여러 산물을 기르며 한 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