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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Ellie Mar 14. 2021

온 마음을 다하는 삶: 나의 '불완전함'을 고백하며

나는 불완전한 나를 사랑한다

온 마음을 다하여, 'wholehearted'는 나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이다. '온 마음을 다하는 삶'을 살기 위해 나는 어려운 용기를 냈고 온전한 나로 살아내려는 노력을 부정당하는 순간에도 스스로에 대한 연민으로 길고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켠에 해결되지 못한 묵은 감정은 때론 내 영혼을 침범하고 생각의 자유를 방해한다.


글을 쓰다가도 목구멍에 걸린 말들이 애써 빠져나오지 못하고 고르고 고른 단어들로 날 것의 감정들을 대신할 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나는 마음속 묵은 감정의 실타래를 풀고 온 마음을 다하는 삶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졌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느슨한 연대'를 통한 유대감 쌓기


나의 유대감의 근원을 따라가 보자. 나의 유대감이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지만 '나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이 글에서 따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내가 가진 취약한 유대감은 늘 타인에게 견고한 벽을 쌓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나의 폐쇄성에 대해 너 님은 누군가에게 '쉽사리 곁을 내어 주지 않는다', '벽을 친다', 나와 덜 가까운 지인들은 나를 그렇게 표현하곤 했다.


물론 그 벽을 뚫고 들어온 가까운 지인들은 내가 얼마나 유대감에 취약하며 상처 받는 영혼인가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간혹, 그 벽을 뚫고 들어온 몇 안 되는 지인들 중에는 내가 보여준 믿음과 헌신에 대한 과한 기대로 멀어지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난 점점 그 허들을 높게 쌓아갔다.


취약한 유대감은 정작 (정서적으로) 내가 어떤 도움이 필요할 때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거나 조언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큰 방해물이 된다. 내면을 괴롭히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스스로 '괜찮아'라고 외면하기 시작하면 그 몫은 고스란히 돌아와 내 영혼을 잠식하고 파괴했다. 내면 아이를 어르고 달래지 않고 외면했을 때 나는 타인에게 차갑게 혹은 나만 아는 사람으로 비치고 있었다.


이런 취약성은 온전한 나로 세상을 살아감에 큰 방해물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두 아이에게 이런 정서적인 결핍을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에 최선을 다해 변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취약한 유대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적극적으로 도움을 찾아 나서기로 한다.


내가 찾은 해결책 중 하나는 '느슨한 연대'이다. 내가 가진 장점을 내어줄 수 있고 필요할 때 언제든지 나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공동체, 반짝반짝 빛나는 내 영혼을 알아봐 줄 수 있을 것 같은 이들이 모여있는 곳을 찾아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필라테스를 사랑하는 멤버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 나와 함께 '낭독과 필사 모임'을 함께 하는 이들, 독서모임에서 만난 성장을 꿈꾸는 동료들까지..


취약한 유대감을 극복해내는 것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느슨한 연대가 주는 참된 가치와 중요성을 안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사람들, 서로의 성장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동료들로부터 받는 정서적 지지와 위로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 직감과 믿음에 따라 판단하기


나는 늘 부모님, 배우자, 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너는 결정을 잘하는 사람이야!', '네가 결정한 것은 정말 믿을 만해!', '결정을 잘하는 네가 참 부러워!'라는 말을 듣고 살아왔다. 그런 나이지만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너무 힘이 들어 정신 분석을 진행하는 박사님을 만난 일이 살면서 딱 한 번 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나와 분리할 수 없을 때 정신적 고통이 어떤 건지 너무 잘 안다. 온몸으로 부정적인 정서를 경험하며 방망이로 두드려 맞는 기분이 들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책하고 부정하게 된다. 나를 전혀 모르는 제삼자 앞에서 나의 취약성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상황은 한결 나아졌고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었다.


흔히들 직감과 믿음은 논리적인 추론 과정이 배제된 순간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직감과 육감은 빠른 추론 과정을 통한 순간적인 상황 판단 내지는 논리적 사고의 산물이다. 그래서 학부 전공도 수학이다. 도리어 그런 직감이나 믿음에서 비롯된 확신이 없으면 굳이 무언가를 빨리 결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만의 해결책이 나타날 때까지 인내하고 되도록 어떤 결정을 보류하는 편이다.


책에서도 언급된 것과 같이 영성과 믿음은 본질적으로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반대되는 말이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불확실성이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불확실함을 인정하고 편안해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살면서 배우자와의 크고 작은 갈등이 있는 순간에도 나는 '직감과 믿음'에 기대곤 한다. 만약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좀 더 기다리고 인내한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더 이상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탓하지 않는다.


그 과정을 통해 난 우리 부부의 몇 번의 위기를 넘겼다.




나를 드러내기보다는 둥글둥글 조화롭게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요구하는 관계 중심의 조직 문화는 내 색깔을 잃지 않으며 회사 생활을 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늘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그 시간들을 버티면서 얻은 지혜라면 나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힘든 시간 속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여정 끝에 나는 '온 마음을 다하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세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묻지 마라.
당신을 살아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그 일을 하라.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살아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하워드 셔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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