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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전투와 시커 타워

젤다의 전설 -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2)

by 김엘리

비탈길을 내려가던 내 귀에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꾸에꾸에..."


돼지가 우는 소린가?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고 살금살금 걸었다. 동물이 주변에 있는 걸까, 아니면... 노인이 말했던 몬스터일까? 하지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릴 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의 신전 쪽으로 올라가는 언덕 쪽으로 가면, 사방을 잘 살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가던 방향을 틀었다.


과연, 신전 옆으로 나 있는 언덕을 올라가 내려다보니 아래 풀밭에 모인 몬스터들이 보였다. 머리 옆으로 넓적하게 처진 귀. 머리 한 가운데 솟아 있는 작은 뿔. 멀리서도 잘 보이는 푸른 기운의 두 눈. 돼지처럼 납작하게 벌어진 코. 굽은 등과 벌어진 어깨. 두 다리로 터벅터벅 걷는 붉은 몸을 가진 녀석은...

'... 보코블린이다!'


간신히 몬스터의 이름이 기억났다. 하이랄 전역에서 가장 흔하게 보이는 몬스터다. 그다지 강하지는 않은 녀석들이지만, 무리로 있다면 상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녀석들은 다행히 나를 알아채지 못하고 서로 쳐다보며 꾸에꾸에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른쪽, 왼쪽을 돌아보니 예상보다 보코블린의 숫자가 많았다.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어 길을 돌아가기로 했다.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게 느껴졌다. 전투를 할 수 있을까? 칼을 들고 훈련한 기억은 있지만, 자신은 없었다. 주변을 돌아보며 몬스터가 안 보이는 신전 계단으로 가는데, 갑자기 계단 아래에서 올라오는 보코블린 한 마리와 딱 눈이 마주쳤다.


'아뿔싸!'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한 손에 든 곤봉에 힘을 주며 빠르게 다가왔다. 등 뒤에 차고 있던 나뭇가지를 재빠르게 꺼내 휘둘렀다. 몬스터와 1:1 상황에서는 선제공격하는 것이 좋다. 방패도 없고, 아직 적당한 무기도 없는 상황이니. 보코블린은 머리에 두 대를 맞더니 손에 든 곤봉을 떨어뜨렸다.


'이때다!'


나뭇가지는 벌써 부러질 것 같았기에 나는 몬스터가 떨어뜨린 곤봉을 낚아챘다. 무기를 떨어뜨려 녀석이 당황하는 틈에 곤봉으로 다시 공격했다. 곤봉을 맞은 보코블린은 끄에에엑-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더니 사라졌다.

손에 든 곤봉을 다시 등에 걸었다. 가빠진 숨을 진정시키고 보니 한숨이 나왔다. 몬스터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막상 마주치고 보니 긴장했었나보다. 하지만 첫 전투를 마친 기분은 괜찮았다. 내게 덤비는 몬스터의 움직임이 눈에 잘 보였고, 언제 공격을 해야 될지 판단하기도 전에 나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좋아, 힘을 내보자.'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다. 다시 길을 가려는데, 바닥에 뾰족한 물건이 떨어져 있었다. '뭐지?'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건 보코블린의 뿔이었다. 몬스터를 처치하면 이런 흔적이 남는구나. 뿔을 줏었다. 손보다 큰 뿔을 만져보니 언제인지 모르지만 상점에서 물약을 샀을 때 가게 주인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이 원기물약은 보코블린의 뿔을 넣어 만들었지요. 지쳤을 때 드시면 금방 회복할 수 있습니다요.'

'그게 가장 좋은 재료인가요?' 내가 묻자, 주인은 이렇게 말했었다.

'더 좋은 재료는 따로 있지만, 보코블린의 뿔은 구하기 쉬워서 흔하게 쓰입니다요.'


물약의 재료가 된다고 했으니 일단은 챙겨 두자. 주머니에 소재를 넣고 다시 길을 가려는데, 한켠에 기괴하게 생긴 물체가 땅에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동굴 안에서 보았던 소용돌이 무늬가 붙어 있는 물체였다. 사람 세 명을 합친 것 만큼의 높이에 윗부분에는 외눈처럼 보이는 둥근 구슬이 박혀 있었다. 이끼가 많이 끼어 있는 걸 보니 방치된 지 아주 오래 된 것 같다. 죽은 몬스터의 잔해인가? 싶기도 했지만 요모조모 살펴보니 몬스터보다는 전투에 쓰는 기계같다. 기계...라는 생각이 들자 예전에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했다.


'이걸 어디서 봤더라....'


떠올려 보려고 애를 썼지만, 물체의 일부분이 부분 부분 생각날 뿐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풀이 타는 냄새, 화약 터지는 소리,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운데 이 기계가 빚을 냈던....


생각하려고 애를 쓰니 머리가 아팠다. 고개를 흔들며 기계의 아래쪽을 보는데, 뭔가 반짝거린다. 몸을 굽혀 보니 꽤나 큰 나사였다. 사실 나사처럼 생겼지만, 나사의 역할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도 알 수 없는... 기이한 소재...


하지만 보코블린의 뿔처럼, 왠지 이 소재도 챙겨가면 어딘가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묵직한 소재를 챙겨 넣고 나는 다시 계단으로 돌아갔다.

계단을 올라 신전 옆의 무너진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신전 안에는 항아리 몇 개가 나뒹굴고 있을 뿐, 특별한 것은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여신상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 맞다. 이 여신상은 다른 곳에서도 본 적이 있다. 하이랄 왕국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하일리아 여신을 나타내는 조각상이다.


'이 곳의 여신상은 매우 크구나...'


여신상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미소를 짓는 듯, 아닌 듯 묘한 표정의 여신상이다. 나는 몸을 돌려 신전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몬스터들이 어디에 있는지 한 번 더 파악할 필요가 있어서 주변의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무 위에는 새 둥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먹음직스러운 알이 2개나 있었다! 이런 건 참을 수가 없지. 나는 재빠르게 새알을 챙겨넣었다.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니, 몬스터가 없을 것 같은 길이 보였다. 나무에서 내려와 신전 앞으로 나온 후, 웅덩이를 빙 돌아가 지도에서 가리키는 지점에 도착했다.

지도가 가리키는 곳엔 커다란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아래엔 유적처럼 보이는 공간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처음 동굴 방에서 시커 스톤을 빼냈던 장치와 똑같이 생긴 것이 있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장치의 가운데 움푹 들어간 부분에 시커 스톤을 넣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조심스레 시커 스톤을 그 불빛이 나오는 부분에 두었다. 예상대로 시커 스톤은 그 기계에 착 맞아들었고, 둥근 앞판이 빙글 반바퀴 돌며 시커 스톤의 화면이 파랗게 빛났다.


"시커 스톤을 확인했습니다. 시커 타워를 기동합니다. 흔들림에 주의해 주십시오."


메시지가 흘러나오고 갑자기 거대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흔들림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진동은 하늘과 땅이 동시에 울리는 것 같은, 꽤나 큰 것이었다. 머리 위에 붙어 있던 바위들이 깨지며 아래로 떨어지고, 바닥이 흔들리며 나는 공중 위로 높이 들어올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흔들림이 멎고 나서 몸을 일으키자,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던 곳이 하늘 위로 훌쩍 올라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커 타워라는 것은 탑과 같은 것인가.... 나는 일어서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대지 위의 더 많은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장치 안에 들어있는 시커 스톤에 문자가 표시되었다.


"시작의 탑"


그러더니 또다른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주변 맵 정보의 입수를 시작합니다."

시커 스톤을 품고 있는 장치 위에는 길쭉하게 튀어 나온, 돌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이 솟아 있는 돌 위에 파란 문자들이 빛을 내며 흘러가더니, 가장 아랫쪽에 물방울이 하나 맺히고, 곧 시커 스톤 위로 떨어졌다.

파랗게 빛나는 시커 스톤 위엔 외눈 마크가 표시되고, 자동으로 지도가 열렸다. 아무 것도 없이 까맣게만 보이던 지도의 일부분이 밝아지며 세세한 지형지물이 표시되었다.


'아... 이 탑에는 주변 지도 정보를 알 수 있는 장치가 있는 거구나...'


내가 있는 탑이 포함된 지역은, 아까 노인이 말했던 대로 시작의 대지라 표기되어 있었다. 탑은 대지의 중앙을 벗어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입력을 마친 시커 스톤은 다시 손에 잡기 쉽도록 튀어올랐다. 내가 시커 스톤을 챙겨 들고 돌아서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잘 들리지 않아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이내 그 목소리는 처음 나에게 눈을 뜨라 했던 그녀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 기억해 내세요..."


어디서 들려오는 목소리일까 두리번거리다 대지 너머 커다랗고 웅장한 성을 발견했다. 아주 시커멓게 보이는 그 성 가운데에는 밝게 빛나는 부분이 있었다. 그 쪽을 바라보자, 다시 바닥에서 커다란 진동이 느껴지며, 주변이 흔들렸다. 나는 성 쪽으로 다가가다 당황하여 멈추었다. 아름다운 목소리는 그 쪽에서 들려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당신은 100년 동안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 괴물이 진정한 힘을 되찾을 때 세계는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번쩍거리는 성스러운 빛의 기운 위로, 새까만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한 눈에 봐도 불길해 보이는 붉은 기운이 함께 번뜩였다. 그 기운은 성 위로 올라갔다 한 바퀴 돌아 내려오는데, 마치 괴물 같았다. 입을 쩍 벌리며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포효하더니, 눈처럼 보이는 부분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러니... 늦어 버리기 전에...어서... 어서..."


그녀가 말하는 괴물은 지금도 충분히 무시무시했고,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진정한 힘을 찾지 못한 것이라니...아까 만난 노인이 지나가듯 말했던, '하이랄 왕국의 멸망'이 생각났다. 성 주변을 맴도는 저 기운이 하이랄을 멸망하게 한 것인가....


한켠으로는 더 궁금해졌다. 그녀는 내게 무엇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일까... 100년간 잠들어 있었다는 나를 깨운 것은 분명 그녀임에 틀림 없을 텐데. 나는 왜 잠들게 되었을까?

저 성으로 가면, 그 해답을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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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일단 탑에서 내려왔다. 단박에 성으로 가려고 해도, 날아갈 수 있는 도구가 없으니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탑에서 내려다 보니, 시작의 대지 자체도 꽤 높은 곳에 있었기에 더더욱 위험했다. 뭔가 이럴 때 쓸 수 있는 도구가 있었던 거 같은데... 그게 뭐였지...


그 때였다. 갑자기 하늘 위에서 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허이...."


위를 올려다보니, 신전 주변에서 만났던 그 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능숙하게, 작은 천을 양 팔로 펼쳐 들어올린 채 하늘을 날아 내가 있는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아 그래! 저 도구였어...! 높은 곳에서 땅으로 이동하려면 저게 필요해!


그는 타워 주변의 땅에 부드럽게 착지하자마자 내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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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 놀랍구만...대지에서 차례로 탑이 모습을 나타나다니...필시 하이랄 대지에 잠들어 있던 힘이 눈을 뜬 게야..."


하이랄 대지에 잠들어 있는 힘?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내게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노인은, 그저 단순한 탐험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무시하려 했다가, 그의 이야기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아 노인에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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