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다의 전설 -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5)
암벽을 기어 올랐다 쉬기를 여러 번, 드디어 사당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와.모다이의 사당이라 한다. 시커스톤을 인증하여 안으로 들어갔더니 커다란 톱니바퀴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여, 멈춰라...'라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린다. 무슨 소리지.... 시간을 어떻게 멈춘다고 그래?
왼쪽에 시커스톤을 넣는 기계가 있어 작동을 시켰다. 아이템 입력을 시작한다고 하더니 파란 물방울이 다시 시커스톤 위로 떨어졌다. 화면을 들여다보니 이번에 입력된 기능은 '타임 록'. 이 기능은 물체의 시간을 멈출 수 있는 기능으로, 멈춘 물체에 일정 방향으로 힘을 가하면 그 힘이 축적된다고 한다. 시간의 멈춤이 풀리면 그 모인 힘으로 물체가 움직이게 되는데, 잘만 사용하면 거대한 물체도 움직일 수 있는 기능이라 한다.
'타임 록...이라.'
물체 하나하나에 시간의 힘이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이 기능은 어떻게 작동시킬 수 있는 것일까? 시커스톤을 받아들고 나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커다란 톱니바퀴를 다시 보았다. 톱니바퀴의 축은 넓적한 판을 계속 돌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저 돌아가는 판을 멈추면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시커스톤을 들어 타임록 기능을 켠 후, 톱니바퀴를 멈추어 보았다. 타임록이 적용된 톱니바퀴 주변에는 투명한 쇠사슬이 살짝 보이는 듯 하더니 일정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 있었다. 와. 신기하다!
시간이 지난 후, 공중에 떠 있는 쇠사슬이 사라지자 톱니바퀴는 다시 움직였다. 나는 다시 타이밍을 보고 있다가, 타임록을 작동시켜 판을 멈추었다. 첫 번째 과제는 그렇게 해서 넘었다.
두 번째 과제는 …굴러오는 커다란 공을 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의 키보다 더 큰 그 공을 피할 공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공을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해야겠다! 타임록을 걸어 공을 멈춘 다음, 가지고 있는 무기로 공을 힘차게 여러 번 때렸다. 타임록이 풀리자 공은 정말 내가 의도한 방향대로 휙~날아가버렸다.
그런 식으로 장애물을 넘고 나자 와.모다이는 기대보다 빨리 만날 수 있었다. 극복의 증표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왔다. 시커 스톤을 켜서 다음 사당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눈이 쌓인 곳으로 내려가야 했다.
하얗게 빛나는 눈 위로 발을 내딛었다. 푹푹 눈 결정이 부서지는 소리가 상쾌하다. 생각보다 미끄러워 조심해서 걸어야 하는 길도 있었다. 차가운 공기에 콧속이 얼 것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노인이 준 방한복 덕에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그러나 길에는 어디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암벽 등반을 최대한 피하려고 가 보면, 불쑥 불쑥 보이는 몬스터들은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전투가 늘 힘든 것만은 아니다. 가던 길에 보코블린 무리가 있어 나무 뒤에 숨어서 살펴보았더니, 불 주변에 화약통을 놓아두고 있었다! 지난 번처럼 이런 좋은 기회가 있다니.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소리가 최대한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불의 화살을 꺼냈다. 화약통까지의 거리를 대략 보았을 때 이 정도 위치면 되겠다 싶은 곳으로 이동, 화살을 쏘았다. 첫번째 발은 불발인데도, 다행히 몬스터들이 알아채지 못했다. 두 번째는 성공해야 한다는 긴장감으로 다시 화살을 쏘았다. 보기 좋게 날아간 화살은 화약통에 명중했다. 동시에 정말 어마어마한 폭발음과 함께 세 마리 보코블린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큰 웃음이 나왔다. 몬스터가 사라진 곳에서 전리품을 챙겨 산 위로 올라갔다.
눈길 위를 올라가는데, 하얗게 빛나는 둥글둥글한 몬스터가 내게 접근해왔다. 이게 뭐지? 하는데, 순간적으로 내게 뛰어들어 온 몸으로 나를 쳤다. 앗! 차가워 온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다시 움직이려고 애쓰자 굳었던 몸이 움직이긴 했는데, 위험했다. 나는 화살로 녀석들을 처리했다. 둥근 몬스터는 팍 터지더니 동글동글한 얼음덩어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차가운 얼음덩이를 하나 줏었는데, 시커스톤에서 소리가 났다. 꺼내보니 화면에 '얼음 츄츄젤리'라는 설명이 뜬다. 내가 모르는 게 있다면 알려주기도 하는구나. 시커스톤의 기능은 참 다양해서 놀랍다. 어쨌든, 얼음 츄츄젤리는 무언가 얼릴 게 있다면 쓸 수 있는 걸까 싶어 챙겨두기로 했다.
츄츄젤리라… 그러고보니 츄츄라는 이름의 몬스터가 생각났다. 원래는 물로만 이뤄진 녀석들이었는데... 날씨가 추운 곳에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과, 추운 곳에서는 몬스터조차도 얼어버려 그 성질이 바뀐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비탈길을 돌아돌아 헉헉거리며 올라갔더니, 커다란 바위가 하나 놓여 있는 산 정상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바위 옆에는 그 알 수 없는 노인이 허허허 웃으며 서 있었다. 바위는 돌기둥같아 보이기도 했는데, 누군가 일부러 세워둔 것 처럼 반듯하게 서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기둥이 있지? 하고 가까이 다가가니 시커스톤의 알림이 뜬다.
'조사하기'
응? 뭘 조사하라는 거지? 싶어서 아래 놓인 바윗돌 사이를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돌 사이에 뭔가 뾰족한 검정 돌이 반짝 빛났다. 들어보니 '부싯돌'이라 한다. 불을 붙일 때 쓸 수 있는 돌이라고 하니 챙겼다. 노인은 먼 산 바라보듯 먼 풍경을 보고 있어, 나는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나를 보더니 웃으며 "절경이군." 이라고 말했다. 노인이 바라보는 쪽을 보니 과연. 하이랄성 주변까지 훤히 잘 보이는 위치다.
"전망이 좋네요."
나의 대답에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음...여긴 무엇 하나 시야를 가리는 게 없어. 이 대지를 한눈에 바라보기에 최적인 장소지..."
그는 전에도 알려주었던 팁을 다시 상기시켰다. 망원경을 사용하여 사당을 찾으라는 것이다. 마침, 노인이 서 있는 방향 쪽에도 사당이 하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산 아래 너머 보이는 또 다른 언덕 위에 사당이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노인을 뒤로 하고 산비탈길을 내려와 건너편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에 또 다른 보코블린 무리를 마주쳤다. 폭탄을 던져가며 녀석들을 상대한 뒤, 겨우 해치우고 올라갔더니, '투미.음케의 사당'이 나왔다.이것이 노인이 말한 마지막 사당이다. 사당 안에 들어가 시커스톤을 인증시켰더니, 이번에는 '아이스메이커'라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아이스메이커는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얼음 기둥을 만들 수 있는 기능으로, 매우 단단하며 녹지 않는다고 했다. 물을 건너가야 한다면 발판이나 징검다리 등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장애물을 만들거나 할 때도 사용할 수 있고 만든 얼음기둥에 한번 더 사용하면 파괴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 출력되었다.
새로운 기능을 사용하라는 듯이, 이번에 들어온 투미.음케의 사당에는 얕은 물이 깔린 장소가 많았다. 아이스메이커를 이용하여 장애물을 넘고, 건너뛰어 사당의 시련을 극복했다. 사당 밖으로 나오니 날이 흐렸다. 그 때 노인이 패러세일을 타고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땅에 착지하자마자 거두절미하고 말을 시작했다.
"이걸로 이 대지에 있는 모든 사당에서 극복의 증표를 손에 넣었구나...허허허..."
그러더니 그는 나를 그윽히 바라보며 입김을 내뿜었다.
"때가 왔군...링크... 이제 자네에게 모든 걸 이야기할 때가..."
!!!
그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럴수가... 이 노인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마냥 시치미를 떼고, 극복의 증표를 모으라 한 거지? 나는 너무도 놀랐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패러세일을 준다고 한 일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구나. 하지만 그는 나의 이런 기분 따위는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몸을 휙 돌려 반대편 대지를 바라보고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4개의 사당이 교차하는 장소로 찾아오게...난...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알겠나...4개의 사당이 교차하는 곳...이...라...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노인이 나를 다시 바라보는데, 그의 몸 주변에 파란 기운이 돌았다. 푸른 불꽃들이 일어나더니 사라지며 그도 어느 새 자취를 감추었다. 그 노인은 사람이 아닌 귀신인가?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어 사당 주변을 돌며 혹시 노인이 있는 것은 아닌가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하이랄의 풍경도 딴 세상의 모습 같다.
시커 스톤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화면을 켜서 지도를 보니 네 개의 사당 위치가 한 눈에 들어온다. 사당과 사당을 잇는 선을 긋는다고 했을 때, 4개의 사당이 만나는 교차점은 시간의 신전 주변인 것 같았다. 시커 스톤을 다시 집어넣고, 나는 망설임없이 발을 내딛었다. 가야만 한다. 노인이 나를 알고 있던 사람이라면, 자고 있던 나를 깨운 그 목소리와 이 노인도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이야기 할 때가 왔다니, 빨리 가서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데서 오는 답답함을 벗고 싶었다.
시간의 신전에 도착했다. 신전 앞에는 보코블린 한 마리가 무기를 들고 서성이고 있어서, 그를 피해 옆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그런데, 신전에 들어왔더니 커다란 여신상 앞에서 전에는 보지 못했던 눈부신 빛이 반짝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기로 했다.
작은 여신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커다란 여신상 앞에 섰더니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슨 기도를 하라는 것일까... 내가 하이랄 사람이라면, 분명 이전에도 기도를 했겠지? 하지만 어떻게 기도를 할 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신성해 보이는 빛을 느끼며, 나는 그냥 마음으로 하일리아 여신을 불러보기로 했다.
'여신님...'
그런데, 나의 그런 마음 속 부름에 여신이 바로 대답했다. 여신의 머리 위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리며, 맑은 기운의 웅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련을 넘어서고 극복의 증표를 얻은 자여...그대에게 힘을 내리겠습니다..."
잠시 간격을 두더니 다시 여신은 말을 이었다.
"이미 극복의 증표 4개를 지니고 있는 모양이군요...그 극복의 증표 4개와 바꾸어 원하는 힘을 내리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힘이요...?'
나의 물음에 여신이 대답했다.
"그대는 생명의 그릇과 스테미나의 그릇, 둘 중 하나를 늘릴 수 있습니다. 그대는 오랜 잠에 들었다 깨어나서 생명력이 약한 상태입니다. 또한 현재는 체력도 약하지요. 그런 몸으로는 시련을 통과하더라도 재앙을 토벌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극복의 증표 4개를 모으는 자는 생명력이나 스테미나를 더 늘릴 수 있는 그릇을 받게 됩니다... 그릇을 늘리면 그대는 힘을 더 가질 수 있게 되지요...그대의 모험에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구나! 그럼 그 노인은 나에게 힘을 늘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고... 사당에 들어가 보물찾기를 하라고 한 것이었구나...
여신이 내게 다시 물었다.
"원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나는 망설이다가, 일단은 생명의 그릇을 늘리겠다고 대답했다. 산을 오르거나 언덕을 뛰어갈 때 스테미나가 부족해 숨이 차서 힘들었다. 그렇지만 몬스터에게 한 대만 맞아도 꽤 아픈 데다가 생명력이 약한 상태라는 말을 들으니 생명의 그릇부터 늘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신은 나의 청에, 원하는 힘을 내리겠다고 대답했다. 여신의 음성이 끝나자마자, 허공에 갑자기 붉게 타오르는 하트 모양의 금장식이 나타났다. 그 커다란 표식은 나에게로 날아왔는데, '나를 잡으세요'라고 속삭이는 듯 하여, 나는 두 손을 뻗었다. 내 손 위로 떠올라 반짝이던 하트는 순식간에 나의 가슴께로 무언가 힘을 불어넣고는 사라졌다.
"생명의 그릇은 시련을 극복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귀중한 것... 생명력의 한계가 늘어났습니다..."
여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자.. 그럼 이제 가도록 하세요... 부디 이 하이랄에 안녕을...."
여신의 목소리가 멀어지면서, 여신상 머리 위를 찬란히 밝히던 빛도 사라졌다. 여신상을 다시 올려다보며 신비한 체험에 얼떨떨한 기분인데, 나의 머리 위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신전 천장 쪽에 뭔가 있다! 다소 긴장하여 뚫린 천장을 바라보는데, 바로 그 노인이었다.
"여신의 축복을 받아 한층 더 믿음직스러워졌군...난 여기 있네... 얼른 올라오게나..."
믿음직스럽다니, 이 사람은 나를 믿고 있었다는 건가? 나를 알고 있다는 저 노인에게 얼른 자초지종을 들어야겠다 싶어 서둘렀다. 천장까지 올라가는 길이 있을 터였기에 신전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나오니 예상대로, 신전 벽을 쭉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있었다. 사다리를 한칸 한칸 밟아 올라 곧 부서질지도 모르는 허술한 신전의 지붕 한켠을 따라 노인이 서 있는 탑까지 올라갔다.
노인은 내가 신전 탑에 오르는 것을 보더니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대단하군...그럼, 내 본 모습을 보여주도록 할까..."
그는 갑자기 근엄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내 이름은 로암.보스포라무스.하이랄...한때 이 땅에 존재한 나라 하이랄... 그 마지막 왕이다."
그가 이름을 밝히자마자 섬광같은 빛이 나타났다. 너무나 눈이 부셔 나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빛이 나타났다 사라지기에 다시 눈을 떠 보니 그는... 왕족의 옷을 입고 왕관을 쓴, 그야말로 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푸른 불꽃이 그의 주변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나라는 100년 전, 대재앙에 의해 멸망했다...라고 말했었지...나는 그때 목숨을 잃고 지금은 영혼뿐인 존재가 되었다..."
헛... 영혼이라....! 영혼이 갈 곳을 잃고 세상을 떠돈다는 것은, 살아 있을 때 미처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어서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랬구나! 그가 영혼이라는 걸 알게 되자, 젊은 나보다도 더 빨리 움직였었던 그의 행동이나 갑자기 사라졌었던 일들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기억이 온전치 못한 그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면 혼란스러울 터.....그리 생각하여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었구나. 그는 나를 속일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기억이 없는 나를 생각하여 왕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잠에서 깬 나를 만나려고 그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알고 보면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더니... 그의 엉뚱해 보이는 행동과 말에 다소 화가 나기도 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배려일 수 있었다는 것에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내게서 몸을 돌려 창가로 다가가 멀리 보이는 하이랄 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곁눈질로 나를 바라보더니 아주 나즈막히 말했다.
"...용서해라..."
그리고는 다시 하이랄 성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는 이야기하지.....100년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재앙 가논의 정체...그것은 아주 먼 옛날 이 나라에서 태어난 마왕이 원념으로 변하여 부활한 모습이다. 본디 가논은 전설이나 동화 속에서 등장하는 자라고 알려져 있었지..."
전설이나 동화라... 가논...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가...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 중에, 가논 이야기가 있었는지 곰곰히 생각하는데, 하이랄 왕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어느 날, 점술사로부터 하나의 예언을 듣게 되었다...
[ 대지에 재앙 가논 부활의 징조가 있노라...
그러나 가논에 대항할 힘 또한 대지에 잠들어 있으니...]"
"우리들은 예언에 따라 발굴을 시작했다...그 결과, 아주 먼 선조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유물을 상당수 발견했지...사람이 조종하며, 짐승을 본뜬 4개의 거대 유물 신수...스스로의 의지로 적과 싸우는 기계 병사 가디언..."
'가디언!'
왕의 입에서 가디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순식간에 나는, 사당 옆에서 나를 조준했었던 그 병기가 떠올랐다. 그 기계 병사가 사람들을 공격했었던 일도, 집이 무너지고 길이 폭파되었던 일들도 떠올랐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선조들이 만든, 적을 상대하는 병기였다고? 그렇다면.....어째서 하이랄 사람들을 공격한거지?
"그것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 나라에 전해지던 전설과 정확히 들어맞았다...봉인의 힘을 지닌 왕가의 공주와 퇴마의 검에게 선택받은 기사......그들은 아주 먼 옛날 유물들과 함께 가논을 봉인해 두었던 것이다..."
왕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야 선조의 유물이 적의 병기로 변한 이유를 알게 될 것 같아 나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는 왕가의 공주와, 선택받았다는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100년전의 왕국에는 힘의 계승자인 공주와 재능 있는 기사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도 선조들처럼 진을 치고 기다리기로 하였다...하이랄 내에서 특별히 우수한 능력을 지닌 4명을 뽑아, 신수를 조종하는 임무를 맡겼고...또 공주를 필두로 그들을 영걸이라 하여 이름 붙여 결속을 다졌다...."
'영걸...이라....'
어디선가 친숙한 이름이다. 영걸이라 부르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고개를 갸웃하는데, 왕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공주와 5명의 영걸이 모임으로써, 재앙을 봉인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교활한 가논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부활했다. 녀석은 하이랄 성의 지하 깊은 곳에서 나타났다. 가논이 나타나며 사방에 뿌려진 원념이 사신수와 가디언을 순식간에 점령했지. 그렇게 가디언과 사신수를 빼앗은 가논이 습격을 하여 성의 주민들과 신수의 영걸들은 목숨을 잃었고..."
신수의 영걸들이 모두??? 너무나 놀란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하는 하이랄 왕의 목소리가 아주 낮아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원통했다. 영걸들을 뽑고, 유물을 조사해 신수를 조종하도록 했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공격에 대비한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순간에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선택받은 기사도 공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부상을 입고 쓰러져 버렸다...이리하여 하이랄 왕국은 재앙 가논에 의해 괴멸당한 것이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한 하이랄 왕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멀리 보이는 하이랄 성에서 재앙 가논이 움직였다 잠잠해지는 것이 내 눈에도 들어왔다.
"......하지만......살아남은 공주는 그럼에도 홀로 가논에게 저항했다."
그 때, 어디선가 들었던 목소리가 -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착각인가 싶어 나는 귀를 짚었다. 지금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기억 속의 목소리였다.
'링크.... 뒤를.... 부탁합니다...당신만이 마지막 희망......부디......'
하이랄 왕은 내게, 혼자 남아서라도 가논에게 대항한, 그 용감한 공주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젤다. 하이랄 왕의 딸...
'젤다?'
그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하는 순간, 왕은 결정적 한 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젤다를 지키던 기사.....그것이, 그대이다. 링크."
그는 나의 이름을 다시 부르며 등을 돌려 내 눈을 쳐다보았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내가, 이 내가... 공주를 지키던 기사였다고?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멍해진 나를 바라보며, 하이랄 왕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그대의 운명은 한 번 끝났었다......하지만 이 대지의 사당으로 옮겨진 후 100년에 걸쳐 비로소 소생하게 된 것이지. 그대가 눈을 뜨고 난 후, 몇 번이나 들었을 인도하는 목소리......그것은 지금도 하이랄 성에서 가논을 억누르고 있는 젤다의 목소리다."
..... 그 아름다운 목소리는 젤다 공주의 .... 그래서 어딘가 애절하고, 슬프게 들렸던 것이었나....
하이랄 왕은 바닥을 내려다보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젤다는 곧 힘을 다하게 될 터......그때 녀석은 완전히 부활하여 이 나라는 결국 멸망하게 되겠지."
그녀가, 곧 힘을 다한다니.... 큰일이다! 싶은 마음이었다. 그 때, 왕이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깊어졌다. 슬프게 보이던 그 눈빛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링크여...나라를 지키지 못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는 한 마디, 한마디를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이어나갔다. 그리고는 왼손 주먹을 꾹 말아 쥐며 말했다.
"그럼에도 부탁하고 싶구나...가논을 쓰러뜨려, 사람들을......그리고 나의 딸을 구해 다오."
그녀를....! 사람들을......그리고 이 나라를 구해 달라......왕의 부탁은 아주 진중했다. 사실, 내가 기사였다면 그는 나에게 부탁하지 않고 명령했을 터였다. 어쩌면 이것은 그가 내게 내리는 최후의 명령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가 내게 부탁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때문이다. 완전치 못한 나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사신수는 아직도 가논에게 빼앗긴 상태...하이랄 성에도 많은 가디언들이 돌아다니고 있지. 지금의 그대가 바로 성으로 향하는 것은 버거울 터......"
하이랄 왕은 다시 창가로 몸을 돌려 하이랄 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내게 조언을 건넸다.
"우선 이곳으로부터 동쪽 땅의 마을을 찾도록 해라."
그의 눈빛이 나를 창가로 이끌었다. 나는 그가 바라보고 있는 창가 가까이 다가가 그의 옆에 섰다. 그는 손가락으로 창 너머를 가리키며 마을의 이름은 '카카리코'라고 일러주었다.
"그곳에 사는 임파라는 자가 그대가 가야 할 길을 알려줄 것이다. 카카리코 마을의 장소는 시커 스톤의 맵에 나타나 있다. 우선 저 쌍둥이산을 넘어 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도록 해라..."
쌍둥이산? 카카리코? 왜 이렇게 지명이 낯설담... 왕이 가리키는 손 끝에는 양쪽으로 비슷하게 생긴 산이 나란히 서 있는, 다소 특이한 지형이 보였다. 산의 모양을 확인하는데, 노인, 아니 하이랄 왕이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는 이제 약속했던 패러세일을 내게 건네주었다.
"......자아, 약속한 패러세일이다. 이걸로 이 대지의 절벽을 뛰어내릴 수 있을 터..."
그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정말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가논을 홀로 상대하고 있는 공주를 생각하면, 그의 심정은 지금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대에게 전해야 할 말은 이게 끝이다...... 그럼, 부탁하마. 링크......"
그는 부탁한다는 말 하나만을 남기고 푸른 불꽃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사라진 하이랄 왕의 모습을 보니, 괴팍한 노인이었던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구운 사과를 훔치는 거냐고 꾸짖었다가 농담이라고 웃던, 이상한 할아버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왜 그가 공주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안타까워했는지도, 나에게 덮어놓고 대단하다고 하거나, 사당을 깨는 일 정도는 내겐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믿음직하다고 말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영걸이라는, 그가 믿었던 부하들 중 남은 사람은... 그의 말에 의하면... 바로 나 혼자 뿐이니까. 젤다공주가 내게 '당신이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한 것 처럼, 이 사람에게 나 역시, 마지막으로 부탁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일 테니까.
그러나 처음 마음과는 다르게, 패러세일을 받은 나의 기분은 후련했지만 한편으로 좋지만은 않았다. 그의 부탁을 정말 들어야만 할까?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겠지? 사실이라 하더라도, 나는 일단 내가 그런 기사였다는 것을 스스로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무기를 알아보고 쓸 수 있었고, 생각보다 활도 척척 쏘는 나의 능력이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아까 왕이 말하지 않았던가. 공주를 지키던 마지막 기사는 퇴마의 검이 선택한 사람이었다고. 만약 내가 그 기사가 맞다면, 나에겐 퇴마의 검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나 내게는 그 검이 없다. 거기다 과연, 신수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병기를 조종할 정도로 뛰어난, 거기다 나라에서 제일가는 사람으로 뽑힌 영걸들이 모두 목숨을 잃을 정도의 상대.... 재앙 가논을 상대할 사람이, 스스로를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니!
나는 아직 나를 잘 모른다. 내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알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대단한 영걸이었다는 걸 믿기 힘들었다. 엄청났던 100년전의 과거가 - 가디언을 제외하고 -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창밖을 바라보며, 하이랄 성을 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성은 원념에 둘러싸여 언제든지 망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처럼 보인다. 저 성에서 공주가 홀로, 재앙을 막고 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젤다라는 이름은 정말 익숙한 느낌이었다.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았어도, 내가 그녀의 이름을 많이 불렀던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하니, 얼마 전에 떠올렸던 가디언에 대한 기억이 났다. 가디언을 피해서 정신없이 뛰었을 때, 정말 내가 꼭 쥐고 있었던 손 - 이 손만은 절대 놓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 그 손.... 그렇다면, 그 손은 젤다 공주의 손일 터였다. 공주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싸웠다던 사람이 나라면, 그 기억은 왕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증거다.
그래. 나는 좀 더 이 땅을 탐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랄 왕의 이야기에 나왔던 카카리코 마을의 임파를 찾아가면, 나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은 복잡하지만 길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운명이라는게 그 길로 이어져 있다면, 시험해 보리라.
나는 방한복을 갈아입고 창가 위로 올라가 뛰어내리면서 바로 패러세일을 펼쳐 보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며 나를 공중에 붕 띄웠다. 이렇게 쉽게 이동할 수 있다니! 방금 전의 고민은 어디론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하늘을 날며 쌍둥이산이 있다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이제 다시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