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하이랄 성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69)

by 김엘리


ㅇ월 ㄴㄴ일


코로그의 숲에서 나온 뒤, 마구간에서 휴식을 취했다. 부족한 요리와 물약을 만들고, 마구간 행상인 테리에게서 화살도 구입했다. 다음 행선지는 겔드의 마을. 아직 탑을 밝히지 않은 남서쪽이라, 어느 지역을 통해 접근할지 생각을 해 보았다.


지도를 살피며 가 봤던 곳, 가 보지 않은 곳을 체크했더니 아무래도 가보지 않았던 곳을 간다는 조건을 건다면, 최단 거리는 하이랄성을 끼고 돌아가는 길이 제일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동안 마구간에서 이리저리 모은 정보를 고려할 때, 하이랄성의 북쪽 선착장 방면은 비교적 안전할 것 같았다. 하이랄 이곳저곳에서 활동하는, 보물을 찾아다니는 트레저 헌터들도 그쪽으로는 드나들기를 시도해 성공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니까.


하이랄성 주변은 꽤 넓고 깊은 해자가 있고, 성 북쪽은 미로숲 바로 아래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가디언의 위협은 좀 적지 않을까? 가디언은 물에 빠지면 바로 망가지니까… 약점이 드러난 곳 가까이는 가지 않겠지.



그런 판단을 통해, 나는 무기를 정비한 후 하이랄 성의 북쪽으로 달려 나갔다. 말을 타고 갈까 생각도 했지만, 길이 나 있는 곳이 아니고 경사도가 심한 곳도 있는 것 같아 말을 데리고 가면 더 성가실 수도 있기에 말을 타지는 않았다.


하이랄 성 북쪽 해자 옆 언덕은 인적이 드물어, 수풀이 매우 길게 자랐다. 내 모습이 수풀 안에 묻힐 것 같은 곳도 종종 있어서, 스탈 몬스터들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을 제외하면 예상보다 훨씬 수월하게, 적을 만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



하이랄 성을 지나치다 보니 처음 보는 특이한 구조물을 마주쳤다. 데스마운틴에서 하이랄 성을 바라볼 때도 눈에 띄어서 신경 쓰였던 것인데, 가까이서 봐도 어떤 구조물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땅에서 불쑥 솟아올랐을 듯한 사각기둥의 형태를 가진 그 구조물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지 곰곰이 생각하다, 사당의 내부 벽과 비슷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사당에 들어갔을 때 봤던 벽의 무늬… 그 배열과 비슷한 문양이 기둥 전체에 퍼져 있었다.


'이 기둥은 사당이 만들어진 재질과 같은 것일까...?'

하지만 기둥은 원념에 물든 가디언과 똑같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갔는데, 갑자기 머리 위 하늘에 가디언 비행체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순간 긴장해 바닥 쪽으로 몸을 낮추고, 기둥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살펴보니 해자 위를 비행 가디언 2대가 번갈아가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비행체를 피해 돌아가려는데, 다른 방향에서 비행 가디언이 나타나더니 나를 바로 감지했다. 빨간 불빛이 내 머리 쪽으로 날아오는 느낌에, 리발의 용맹을 사용해 공중에 뜬 후 아껴두었던 고대의 화살로 비행체를 맞추었다. 순식간에 비행 가디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패러세일을 펼쳐 성 방향으로 튀어나와 있는 나루터에 안착했다.


그런데, 비행 가디언 한 대를 없앤 기쁨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나루터 주변에서 하이랄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뒤편에 있던 그 기둥에서 새로운 비행 가디언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한 대가 사라지니 또 다른 한 대가 나온다.... 이 기둥은 가디언을 내보내기 위한 것…?이었구나…



거기 서서 가디언을 상대하다간 끝이 없겠다 싶어, 나는 비행형 가디언이 멀리 떨어진 것을 확인한 순간 하이랄 성의 해자 쪽으로 몸을 던져 패러세일을 펼쳤다. 출발할 때만 해도 성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하이랄 성 주변에 도달해 보니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가디언이 무수히 많아서 접근조차 할 수 없다면 모를까, 바로 해자 건너편에 … 성이 있다. 하이랄 성에 들어가면 좋은 무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 왠지... 성에 들어가면 무언가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한 느낌도 들었다.


방향만 잘 잡으면, 리발의 용맹으로 공중에 높이 뜰 것도 없이 하이랄 성 아래 지면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나는 패러세일을 펼쳐 가장 가까운 바닥이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마침 바람이 적절한 방향으로 불어서, 큰 어려움 없이 하이랄 성 바로 절벽 아래의 땅에 도달했다.


그런데 패러세일을 접자마자, 하늘이 더 어두워지며 무언가 공기를 가르고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는 게 느껴졌다. 원념이 기운이 하이랄 성을 감싸 성 주변 공기를 붉게 물들였다. 동시에 무시무시한 짐승의 포효 같은 소리가 들렸다.



재앙 가논이 울부짖으며 성의 가장 높은 탑을 감싸고돌자, 성의 본관 쪽에서 밝은 빛이 순간 반짝 빛났다. 뒤이어 그 빛은 점점 커지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젤다....?'

회생의 사당에서 처음 눈을 뜨고 밖으로 나와서, 영문도 모른 채 시커 타워에 올랐다가 마주쳤던 그 빛.... 젤다 공주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보였던 바로 그 빛이었다.


그땐 그 빛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젠 알 수 있다. 젤다 공주가 저 빛나는 곳에서 재앙 가논을 누르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표시다...


미안, 젤다 공주… 좀 더 기다려 줘요…



주변에 가디언이 없는지 둘러보는데, 시커 스톤에 '하이랄 성'이라는 알림이 크게 울렸다. 적진의 본거지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 되었으니, 긴장되었다.



하이랄 성에 들어가면 아마도... 100년 전의 일들이 좀 쉽게 기억이 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내가 하이랄에서 최연소 기사가 되었다면, 하이랄 성에는 문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드나들었을 것이므로. 100년 전, 재앙이 닥치기 전의 내 주요 생활공간이자 직장에 간다면... 젤다 공주의 기억에 의지하지 않아도 무언가 더 생각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막상 하이랄 성에 도착하니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


괜히 들어왔나? 잠깐 후회도 되었지만 기왕 들어온 거, 무기라도 뒤져보고 나가자는 생각에 모퉁이 하나를 돌았다. 그랬더니 기대하지 않던 커다란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커 스톤에 뜬 하이랄 성 입체 지도를 살펴보았지만, 어디가 어딘지 파악이 쉽지 않아 시커 스톤을 끈 다음 무작정 그 입구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마주친 것은 굳건한 철문이었다. 철문 너머를 슬쩍 보는데, 긴 복도로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철문 아래는 약간의 물이 고여 있었는데, 아이스메이커를 이용하면 문을 쉽게 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커 스톤을 다시 켰다.



아이스메이커로 얼음 사각기둥을 만들어 안으로 들어가는데, 시커 스톤에서 '감옥'이라고 알려준다. 아... 감옥? 감옥이라면... 여기는... 가끔 병사들이 훈련을 했던 장소였을텐데.... 그리고 병사의 시험 장소도 있었다. 제일 마지막 안쪽 방에서 히녹스를 혼자 처치하는 것이 시험 문제였지... 조금씩 기억이 나는 것 같다!


안으로 들어가니 감옥마다 리잘포스, 모리블린이 있어서 화살로 공격하며 빠르게 긴 복도를 지나갔다. 그렇지만 안을 보니 크게 대단한 무기는 없는 것 같아 다시 돌아 밖으로 나왔다. 제일 안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히녹스 비슷한 몬스터가 있을 것이기에, 벌써부터 체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감옥 입구에서 나와 하이랄 성의 관문이 있는 쪽으로 올라갔다. 중간중간 포대형 가디언과 비행형 가디언의 감시망을 피해 벽을 타고 올라갔다.



벽을 타고 한 층 위로 올라갔더니, 하이랄 성 외곽 관문과 연결된 복도 구조의 건물을 만났다. 좁은 건물과 절벽 사이에도 가디언의 감시망이 촘촘히 깔렸기에,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병사가 되었을 때 보초를 섰던 곳… 수없이 드나들었기에 이곳은 금방 기억났다!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조금 신나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이 복도식 건물은 뾰족한 탑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어서 가디언의 감시망에서 잠시 벗어나기에 좋았다. 사다리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밖으로 난 창을 통해 비행형 가디언이나 포대형 가디언의 위치를 파악한 후, 감시망을 피해 다른 건물로 숨어드는 방식으로 점점 성의 중심 건물에 가깝게 다가갔다.



새벽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려니 소나기가 내리기에, 젖은 상태로는 마음대로 등산이 힘드니 이대로 잠시 쉬기로 했다. 장작더미 1개와 부싯돌을 꺼내 무기로 휘둘러 모닥불을 만들었다.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 그런대로 아늑했다. 100년 전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잠깐 졸았다고 생각하고 눈을 떴는데, 어느새 한낮이었다. 밖을 보니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았고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대로 건물 밖의 벽을 타고 올라가서 층 하나를 더 올랐더니, 드디어 성의 주요 건물이 있는 층에 다다르게 되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또 위에 성탑이 있는데... 여기는... 왠지 낯이 익은 곳이다.



본관과 연결된 다리가 있는 저 탑.... 익숙한 풍경이었다. 한밤에도 불이 희미하게나마 켜져 있었던 탑의 모습이 겹쳐 떠오르면서 나는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다. 비행형 가디언이 탑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어서, 혹시나 들킬까 봐 벽 그림자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저 탑.... 이렇게 낯익은 것을 보면, 분명 젤다 공주와 연관이 있는 장소일 것이다.



탑 쪽으로 최대한 빨리 가려면 역시 암벽 등반 외에는 답이 없을 것 같아 낑낑거리며 벽을 올랐다. 바로 암벽 너머에 가디언이 있다는 표시가 나타나 마음이 급해졌다. 벽을 타고 위로 뛰어오르기 전, 살짝 동태를 살피니 지면에 박혀 있는 가디언은 내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재빨리 위쪽 땅을 밟자마자 가디언 랜스를 꺼내 가디언의 센서를 피해서 본체를 마구 찔러댔다. 긴장하고 있어서인지 쓸데없는 동작이 많이 나갔다.



그래도 창과 검으로 번갈아가며 공격했더니,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가디언은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전리품을 챙긴 후, 앞에 나 있는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 건물의 오른쪽으로 들어섰다. 건물 한쪽 벽이 무너져 있어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보니 블랙 모리블린 한 마리가 방안을 서성이고 있다 나를 발견했다. 몬스터가 선수를 치기 전에, 얼음 속성이 붙은 마법 지팡이를 휘둘러 모리블린을 얼렸다. 모리블린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하고 화염의 대검으로 무기를 바꾼 후 다시 모리블린을 쳤다. 모리블린을 감싼 얼음이 녹았다가 불 공격이 들어가면서 모리블린은 다시 넘어졌다. 속성 공격을 두 번 더 반복했더니 블랙 모리블린은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리고, 별다른 저항 없이 사라졌다.



모리블린을 해치우고 난 후 방을 돌아보았다. 들어와 본 적은 없는 곳 같았지만 방이 꽤 컸다. 나뒹굴고 있는 가구와 소파, 한쪽 구석의 침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심의 대검을 집어든 후, 벽난로 위에 있는 활을 발견해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았다. 와... 시제품이긴 하지만 공격력이 꽤나 높은 근위의 활이 빛나고 있어서 재빠르게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벽난로 아래에는 화살 뭉치도 있었다. 이게 웬 횡재람.



꽤나 등급이 높은 무기들이 있는 이 방은 누구의 방이지? 왕족의 방이었을까? 한쪽 구석에 책상이 놓여 있길래 가까이 다가갔는데, 다른 것들은 불에 타고 망가졌어도 아주 낡은 책 하나는 펼쳐진 채 비교적 손상 없이 놓여 있었다.



무슨 책일까 가까이 가서 보니... 젤다 공주의 일기였다!..... 그렇다는 건, 이 방이… 젤다 공주의 방….


젤다 공주의 방에는 와 본 적이… 없다. 나는 늘 공주 호위를 위해 식당에서 기다렸지… 그녀와 하이랄 왕이 식사를 하는 동안, 식당의 바깥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공주와 하이랄 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 그래! 아까 이 방으로 올라오는 계단 앞까지 호위를 했었고…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일기를 다시 쳐다봤다. 펼쳐진 페이지를 들여다볼까, 말까 망설여졌다.


그녀의 일기를 읽어도 되는 걸까? 실례가 되는 것은 분명한 일… 하지만, 하지만…


내 기억을 찾으려면 봐야만 할 것 같아 마음을 굳게 먹고일기장을 읽기 시작했다. 가지런한 글씨가 젤다 공주다웠다...



[ 첫 번째 젤다의 일기 ]

영걸들과 회합을 가진 후 유물조사에 나섰으나 오늘은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재앙이 부활하기 전까지 모든 유물을 이해하여 요격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데, 점술사의 예언이 맞다면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생각을 할수록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오늘은 이만 자야겠다.

추신 : 내일 아버지 명령에 의해 그가 나의 전속 호위 기사로 임명된다...


내가 젤다 공주의 호위 기사로 임명되기 전날 밤의 일기였다. 호위 기사의 일을 일기에 적어두다니... 젤다 공주는 내 생각보다도 나를 더 많이 신경 쓰고 있었구나 싶었다.



[ 두 번째 젤다의 일기 ]

신수 바. 루다니아 조정을 위해 고론 시티에 갔다... 뒤에서 계속 그의 시선이 느껴져 피곤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그는 말수가 너무나도 적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자꾸 쓸데없는 상상을 하게 된다... 퇴마의 검에게 선택받은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이랄 왕가의 딸로 태어났음에도 봉인의 힘을 쓸 수 없는 나를... 경멸하지 않을까?


음... 그래, 이 부분을 읽으니 찾았던 기억이 바로 생각났다. 코모로 주둔지 주변에서 젤다 공주가 내게 던졌던 질문이 있었지. 퇴마의 검에서 들린다는 목소리를 잘 듣고 있냐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기억을 찾을 당시엔 잘 몰랐는데, 젤다 공주의 이 날 일기를 읽고 보니 이제 이해가 되었다. 퇴마의 검에게 선택을 받았다고 하니, 검에게서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것이냐 물었던 것인데... 흐음. 아직 마스터 소드를 뽑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기억에서는 검에게서 메시지 같은 것을 받은 기억은 없다... 기억을 못 찾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검의 목소리를 들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나는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 말수가 적었다고 하니 간단히 대답했으려나. 기억은 찾았는데, 왜 대답을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


젤다 공주는 내가 말이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확실히... 나는 붙임성이 없긴 하다. 지금도 정보를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질문을 던질 뿐, 관심 없는 일에는 굳이 참견을 하거나 생각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이 일기를 읽으니 생각났는데, 나는 일부러 말을 안 할 때도 많았던 것이 생각났다. 오랜만에 만났던 미파도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갑자기 말수가 줄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했었다고... 동시에 내가 별생각 없이 뱉었던 말이 이상한 소문으로 돌아왔던 일이 생각났다.


맞다. 그러고 보니 마스터 소드를 뽑은 뒤, 내가 퇴마의 검을 뽑은 것을 믿을 수 없다며 결투로 증명하라고 덤비던 사람이 있었던 것도 생각났다. 하이랄 왕께서 알고 그를 꾸짖으셨고,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 일로 사람들의 달라진 시선을 깨달았었지...


아버지께서 더욱 타의 모범을 보이며, 정진하라고 꾸짖으셨던 일도 생각났다…


.... 생각지도 못했던 기억들까지 떠올라 당황스러웠지만, 100년 전의 내가 사람들 앞에서 입을 닫아버린 이유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니 젤다 공주 앞에서도 그다지 말을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 세 번째 젤다의 일기 ]

오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르는 것 같다. 미안하지만 그런 부분이 거슬린다.


세 번째 일기는 매우 짧았다. 심한 말을 했던 날....? 무슨 날이었더라? 나는 시커 스톤을 켜서 앨범을 들여다보았다. 아! 사진을 보니 기억이 났다. 고대 돌기둥군의 사당 앞에서, 젤다 공주가 내게 화를 냈었지... 그렇게 화를 내는 걸 처음 봐서 나도 당황했었던....


그날의 기억을 돌이켜보다가 왠지 웃음이 났다. 따라오지 말라고 핀잔을 주던 그녀의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안돼. 귀엽다니... 귀엽다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말도 하지 않고 유물 조사를 훌쩍 가버리는 젤다 공주 때문에 곤란했던 적이 여러 번이었지만, 그만큼 그녀에게 그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 역시 최선을 다 할 뿐이었다만... 그런데 그런 점이 거슬렸다니... 정말 이 정도면, 나는 미움받고 있었던 것에 가까웠구나 싶다. 순간, 다음 일기장 페이지를 넘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 네 번째 젤다의 일기 ]

오늘은 일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내 마음을 글로 잘 표현할 수가 없다.

그가 나를 구해 주었다. 이가단의 칼날에서 나를 지켜 주었다. 나는 그에게 그렇게나 매정하게 굴었는데, 내 멋대로 신경질을 냈는데……

내일 지금까지 했던 일을 사과해야겠다. 그리고 그와… 링크와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다.


앗? 내가… 이가단의 공격에서 젤다 공주를 구한 일이 있었다고? 흠… 이 부분을 읽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지만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진도 들여다봤는데.. 전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근데 이가단이 뭐더라....?



아, 생각났다. 이가단... 하이랄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마주친, 여행자를 가장한 자객 집단. 처음 만났던 곳은 카카리코 마을에서 하테노 마을로 지나가던 길에 마주친 사람이었다. 몸이 좋아 보인다고, 이가단이라는 곳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했었다. 이가단이 뭐냐 물어보니, 코 뭐시기 하는 우두머리를 두고 증오스러운 용사를 쓰러뜨리는 집단이라고 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돌변, 내 이름을 부르며 목숨을 받아 가겠다고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들의 무리다.


카카리코 마을에서도 이가단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어 어이가 없었던...


그런데 그 이가단이 젤다 공주의 목숨을 노린 적이 있었구나.... 100년 전에도! 그렇다면 젤다 공주를 노렸으니 지금은... 젤다 공주를 노릴 순 없는 상황이라 나를 적으로 두는 건가?


그나저나 젤다 공주가 이가단의 습격을 받은 일로, 공주도 호위가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는 계기가 생겼다는 게 이번 일기의 내용이로군... 그리고 그동안의 태도를 사과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구나... 흐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했을 뿐이었고, 공주의 사과는 굳이 필요 없었을 텐데...


다음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내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었다.



[ 다섯 번째 젤다의 일기 ]

링크와 조금씩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는 대식가여서 뭐든 맛있게 먹는다고 한다. 용기를 내서 평소에 왜 말이 없는지 물어보자, 링크는 잠시 망설였지만 대답해 주었다.

늘 주목을 받는 그는 항상 타인의 모범이 되어야 함을 의식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풍부한 재능 덕분에 고민 따위는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누구든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고민이 있다...... 나는 나 자신을 감당하느라 그런 것도 몰랐다. 링크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생각을 알고 싶다. 그리고 내 고민도 그에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음... 사과를 했다 어쨌다 내용은 없지만, 나와 대화를 했다...

먹는 것이 내 최대 관심사... 인 것을 제일 먼저 말했구나. 아마, 다르케르가 준 로스 바위를 먹는 걸 젤다 공주가 본 것도 이때쯤이지 않았을까? 내가 로스 바위를 입에 쑤셔 넣는 걸 보고, 깜짝 놀랐지만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던 젤다 공주의 눈빛.. 지금도 생각난다.


내가 왜 말이 없는지도 물어봤다고? 이런 질문을 받은 기억은 진짜... 돌아오지 않았다... 어쨌거나 솔직하게 대답했구나. 나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했다니... 왠지, 기분이 좋지만 부끄럽다. 마지막 줄에 쓴 공주의 고민은... 생각났다. 재능과 관련된 고민을 비 오는 날 나무 아래서 쉬어가다 털어놓았었지...


그 기억을 찾았을 때, 놀랐고, 당황해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었다. 무슨 대답을 했을지 기억은 나지 않아서, 나름의 대답을 일기장에 적어보기도 했지만 지금 젤다 공주의 일기를 읽어 보니, 그런 대답이 중요한 게 아니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질문은 그때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빗대어 말한 것이었으니까... 그녀에게 해 줄 대답은 이게 낫지 않을까...


"젤다 공주.... 당신은 지금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 하고 있어요. 이 이상 더 어쩌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이미 당신은 하이랄의 공주입니다. 그 이상의 재능은 더 필요하지 않아요..."


다음 페이지를 넘겨 보았다.



[ 여섯 번째 젤다의 일기 ]

아버지가 유물 연구에서 손을 떼라고 명령하셨다. 봉인의 힘을 얻기 위한 수행에 전념하란다.

분하고 창피해서 말이 안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쭉... 노력해 왔는데.

수행을 시작하기 한 해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와 스승을 동시에 잃고 말았다. 어머니는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괜찮아 젤다... 너라면 봉인의 힘을 쓸 수 있을 거야...라고...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몇 번을 해도, 시간이 지나도... 봉인의 힘이 잠재되어 있을 텐데도...

내일은 링크와 함께 힘의 샘에 수행을 하러 간다. 하지만 헛수고가 될 것이다... 분명...


이 일기를 읽으니, 힘의 샘에서 수행을 하다 절망하던 젤다 공주가 생각났다. 너무도 애처로웠던... 젤다 공주의 모습에 그녀의 뒤를 지키면서도 마음이 아팠었지.


할 수만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에서 끌어내어 좀 쉬었다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샘 옆의 제단에 모닥불을 피우고, 하이랄배스를 구워 주면서 먹어 보라고 하고 싶었다. 지금이 그 때라면 그렇게 할 거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일을 적은 젤다 공주의 일기를 읽으니... 원래 봉인의 힘을 깨닫는 방법은 어머니가 딸에게 가르쳐 주고, 또 그 딸이 어머니가 되어 자신의 딸에게 가르쳐 주는 방식인가 싶기도 하다. 재앙 봉인에 있어 스승과도 같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니,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몇 살인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 돌아가셨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 일곱 번째 젤다의 일기 ]

어젯밤 꿈을 꾸었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빛으로 둘러싸인 여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여자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직감했다. 정령인지 여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름다웠다. 입술이 움직이고 있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성스러운 힘이 있었으면 들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건 내 고뇌가 낳은 한낱 꿈인 것일까... 그 답은 곧 싫어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다음 페이지로 일기를 넘겼다.



[ 여덟 번째 젤다의 일기 ]

오늘 나는 17살이 되었다. 지혜의 샘에서 수행이 가능한 날을 맞은 것이다.

링크가 데리러 오면 라넬산으로 갈 것이다. 다른 영걸들은 기슭까지 동행해 준다고 한다.

그날 이후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아직 좀 껄끄럽다... 돌아와서 만나러 가야겠다.

......

사실 예의 그 꿈을 꾼 이후 느끼는 바가 있다.

재능이 없는 공주의 말은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나는 지금 한없이 강한 불안으로 가슴이 떨린다.



그것이 일기의 마지막 장이었다.

라넬산... 내가 찾았던 첫 번째 기억의 장소였다. 라넬산에서도 수행의 결과는 나오지 않았기에, 너무도 불안해하고 힘들어했던 젤다 공주의 표정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 하이랄 왕과 사이가 좋지 않았을 때여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돌아와서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아.... 하이랄 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시내가 이미 불바다였고, 하이랄 성도 아수라장이었지... 청천벽력 같았던 전령의 소식... 하지만 젤다 공주에게는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비가 내렸던 그 숲길에서 내게 안기며 한없이 울었던 젤다 공주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렇게 처절하게 슬퍼했던 건... 아버지를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주먹을 쥐었다.


새벽하늘을 밝히는 이른 태양빛이, 무너진 벽 사이로 비쳐 들어왔다. 나는 … 몸을 돌려 젤다의 방과 연결된 바깥 복도에 발을 들였다. 비행형 가디언이 빠르게 머리 위를 지나가다 나를 감지했다. 재빠르게 뛰어 바깥 복도 반대편에 있는 작은 방으로 몸을 던졌다.



시커 스톤에 ‘젤다의 연구실’이라는 알림이 떴다. 들어오고 나니, 이 방이 젤다 공주의 진짜 방으로 사용되었다는 기억이 났다. 밤에도 작은 불빛이 늦게까지 남아 있었던 곳… 젤다 공주가 자신의 방 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낸 곳… 혹시 젤다 공주가 불을 켜 두고 잠들었을까봐 밤에 몰래 들여다보곤 했었던 곳…


방을 휘 둘러보았다. 외부 충격으로 벽 선반에서 물건이 떨어져 파괴되었거나, 넘어진 물건이 부서진 것을 제외하고는 큰 피해가 있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방 한가운데에 ‘고요한 공주’ 꽃이 피어 있었다. 희귀한 종이라는데, 어떻게 이 방에 이 꽃이 있을까? 푸른빛이 희미하게 여린, 청초한 꽃. 꽃의 이름에 공주가 들어가서 그런지, 마치 주인 없는 방에 젤다를 대신하여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햇살이 들어오는 방, 이곳에는 가운데에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래... 젤다 공주가 이 책상에 앉아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며 바쁘게 메모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책상 위에는 그녀의 글이 쓰인 두터운 수첩이 또 놓여 있었다. 이 수첩... 기억난다. 젤다 공주가 자주 뒤적이고, 메모하던 그 수첩... 연구록이었다.



연구록을 직접 읽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연구록의 시작은, 유물이 발굴됨에 따라 시커족 임파와 로베리, 프루아를 알게 된 일부터 적혀 있었다. 임파... 집행 보좌관이라고 하더니 주로 유물과 관련한 일에서 젤다 공주를 보필했던 모양이다.


특히, 유물로 사당과 가이드 스톤이 발견된 모양인데... 그 가이드 스톤을 조종할 수 있는 유물 발굴이 시급하다는 메모가 휘갈겨 쓰여 있었다. 다행히도 유물 조사는 순조로웠는지, 가이드 스톤 조종용인 돌 유물이 출토되어 그 유물을 집중 조사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돌 유물은 지금 내가 소지하고 있는 시커 스톤이며, 그 이름은 프루아가 지어 준 것임을 연구록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젤다 공주는 '시커 스톤'이라는 이름을 처음에는 선호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연구를 통해 시커 스톤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외 기능 - 특히 가이드 스톤을 조종하기 위한 기능도 있을 거라 전제하고 계속 연구를 진행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연구 내용 외에도 영걸의 신수 조종 훈련에 대한 기록도 조금 있었다. 미파는 처음부터 신수를 잘 조종하였으나 다르케르가 좀 부진했다는 내용이 있어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젤다 공주는 영걸들이 신수를 조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정도 자신이 재앙 가논에 대비하고 있다는 위안을 삼았던 것 같았다.



가디언 연구자 로베리가 발굴한 여러 가디언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기록에 따라 가디언을 찾아 기동시켰던 모양인데, 가디언은 본래 하이랄 성 지하에 묻혀 있는 5개의 거대한 기둥에 격납되어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면... 내가 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봤던 그 이상한 무늬의 기둥은 본래 하이랄 성 지하에 묻혀 있었던 것이구나!


젤다 공주가 열심히 조사를 하던 100년 전에는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던 그 기둥... 젤다 공주는 그 가디언 기둥이 재앙 가논의 출현이 감지되면 자동으로 나오는 것으로 추측하는 내용을 적어 두었다.


가논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젤다 공주의 짐작이 맞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기둥에서 재앙에 물든 가디언이 무수히 쏟아져... 하이랄 백성들을 무참히 공격했다는...


다시 생각해 봐도 참혹한 현실이었다.



그다음 장을 넘겼더니, 젤다 공주의 한탄이 쓰여 있었다. 내용을 읽어 보니 사당과 연관된 내용인 것 같았다. 사당은 재앙을 제압할 용사를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란 기록이 있어, 젤다 공주는 기동방법을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시커 스톤이 그 사당을 기동 할 수 있는 방법일 거라 프루아가 추측을 했다지만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아서 젤다 공주가 매우 답답해했다는 내용이었다.


프루아도 이야기했었지. 자신도 어떻게 사당이 기동 하는지 알 수 없어 곤란했다고. 하지만 용사라는 자가 다시 나타나 활동하자 탑이 솟아오르고, 사당에 시커 스톤을 인식시켜 들어갈 수 있게 되고...


처음 시작의 대지에서 젤다 공주의 목소리에 따라 사당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젤다 공주는 들어가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는데, 사당이 빛을 내기 시작하니 확신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깬 지 얼마 안 된 나에게 시커 스톤을 가이드 스톤에 갖다 대라고 그렇게 말한 것이겠지?



회생의 사당을 발굴한 것에 대한 내용도 적혀 있었다. 내가 잠들어 있었던 회생의 사당은 치유능력을 가진 의료시설이었고... 치료를 위한 장기 수면도 가능한 시설이다... 잠이 들어도 그게 100년 동안이나 유지되다니... 새삼 놀라웠다.


젤다 공주는 회생의 사당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건 나도 의문을 가졌던 부분이긴 하다. 용사가 재앙 가논에게 패배할 가능성을 고려해서 만든 시설이라 본다면... 시커족의 선견지명은 대체 어떤 수준이었나 소름이 돋는다. 젤다 공주는 만년 전, 그런 치료가 필요한 중상자가 있었기에 마련한 시설인 것인지 의문을 남겼다. 그리고 재앙 가논이 부활하더라도, 회생의 사당을 사용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연구록의 내용은 거기까지였다.


회생의 사당... 젤다 공주는 사용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국... 내가 그 시설에 들어가게 되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나. 처음엔 나를 왜 살렸나 싶기도 했지만, 기억을 점점 찾아가며 회생의 사당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모든 것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100년 전의 잘못을 바로잡고, 하이랄 왕의 소망인 젤다 공주를 구출하는 것....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건... 다행이라 해야겠지.



젤다 공주의 연구실을 한번 더 돌아보고, 나는 바깥 복도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연구실 밖의 복도 풍경 위에, 젤다 공주가 흡족해하면서 성 안뜰을 바라보는 모습이 살짝 비쳤다 사라졌다.


응?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무지막지하게 원념의 기운으로 떡칠이 된 하이랄 성의 외벽.... 그 사이에 나 있는 문.... 이 장소.... 혹시?



나는 시커 스톤을 켜서, 사진을 찾아보았다. 이 다리 너머의 문.... 지금의 처참한 모습과 많이 다르지만, 100년 전 사진을 찍은 장소는 이곳이 맞는 것 같았다. 사진을 들여다보다 앞을 다시 바라보니, 젤다 공주의 100년 전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곳에도 기억이.... 내 기억이.... 있구나!



눈을 감았다. 이 돌다리에서 아래 안뜰을 바라보았던 젤다 공주의 모습과, 안뜰에서 가디언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젤다 공주 뒤에 서 있었다.



지금은 다 부서져서 없지만, 100년 전의 하이랄 성... 기억 속에서 떠올리는 것이지만... 아름다웠다.



가디언이 기동을 시작한 모습을 만족하며 바라보는 젤다 공주의 얼굴이 보였다. 아... 그래. 이날은 가디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고, 젤다 공주가 유물 조사를 가기 전에 가동 상태를 보고 가자며 나를 이쪽으로 오게 했었지.



시커족 연구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행형 가디언이 주변의 사물을 인지하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처음 봐서 신기했던 풍경이긴 한데, 지금의 날뛰는 가디언을 보면...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다.


젤다 공주는 가디언을 한참 바라보다가 내게 말을 걸었다.

"가디언도 드디어 움직일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들떠 있었다. 이제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의 진전이 있어 기쁜 모습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녀가 활기차게 유물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모습... 보기 좋았다.

"이대로 가디언이나 신수에 대해 이해도를 넓히면 설령 재앙 가논이 부활한다고 해도 대항할 수 있을 테죠."



젤다 공주가 나를 돌아보면서 좀 더 설명을 해 주는데, 젤다 공주의 뒤에서 묵직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느냐?"



시선을 옮긴 곳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하이랄 왕. 젤다 공주는 돌아보더니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나는 왕의 등장으로 재빨리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했다.



위엄이 서린 표정으로 딸인 젤다 공주를 바라보는 하이랄 왕... 엄한 눈빛...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젤다 공주는 고개를 숙인 채 왼손을 꾹 말아 쥐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가디언에 대한 실험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유물을 완전히 파악한다면, 재앙에 대한 대응도...."

젤다 공주가 유물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하이랄 왕이 공주의 말을 잘랐다.



조금은 부드럽게 말하는 하이랄 왕의 묵직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확실히 고대 유물 연구는 하이랄의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이 나라의 공주인 네가 해야 할 일은 달리 있을 터!"



당시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해 목소리만 들었지만, 이렇게 기억으로 공주의 굳은 표정을 보니... 하이랄 왕께서는 정말 공주에게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으셨던가 싶다...



"언제까지 그렇게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고만 있을 것이냐?"

수행을 해도 깨어나지 않는 젤다 공주의 봉인 능력... 그걸 대신해 유물 연구에 온 힘을 다하는 젤다 공주를 꾸짖는 말... 그런데, 그걸 도망친다고 말하는... 너무도 가슴 아픈 말이었다. 그런데, 젤다 공주... 웬일로 하이랄 왕에게 대답을 했다.



"..... 도망치는 것은 아닙니다....."



젤다 공주는 왼손 주먹을 꼭 쥔 채로, 대답을 이어 나갔다.

"지난번에도 용기의 샘에서 기도를 바치고....."

하지만 바로 하이랄 왕의 질타가 이어졌다.



“유물에 대한 관심을 접고 모든 시간을 수행에 쏟아부으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게다!”



“재앙 봉인의 힘을 너의 몸에 깃들게 하는 방법이 그것 외에 있느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그러니까 적어도, 지금의 저도 할 수 있는 일을…! “


젤다 공주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지만…



하이랄 왕은 그 말을 한마디 호통으로 덮어버렸다.

“변명은 듣고 싶지 않다……왕의 이름으로 명한다! “



“앞으로 유물에 관여하는 것을 일절 허락하지 않겠다! 샘에서의 수행에 전념해라! “



하이랄 국왕은 몸을 돌려 성의 안뜰을 내려다보았다.

“말 많은 왕궁 사람들에게 네가 어찌 불리고 있는지 아느냐?”


“반쪽짜리 공주”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무능한 공주”


그 말을 듣는 젤다 공주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슬픈 듯, 억울한 듯, 여러 감정이 담긴 얼굴을 하고서. 아버지인 왕에게 자신의 감정을 내색할 수 없겠지.


하이랄 왕은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조금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공주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해 보이거라. 알겠느냐? “



젤다 공주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힘겹게 대답했다.

“……네…… 아바마마…..”



그것이 내 기억의 끝이었다. 시커 스톤을 집어넣는데, 하늘에서 비행형 가디언이 나를 조준하는 것이 느껴져 젤다의 연구실 뒤편으로 뛰어 피했다.


건물의 벽을 타고 위에 오른 다음, 비행형 가디언의 위치를 파악하고 뛰어내리면서 활을 겨냥했다. 폭탄 화살을 제대로 맞은 비행 가디언이 멈칫하는 순간, 활시위에 활을 걸어 계속 쏘았다. 늘어난 스태미나는 확실히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구나.


비행형 가디언을 해치우고, 다시 기억의 자리에 섰다. 젤다 공주가 내려다보았던 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공주의 일기에, 분하고 창피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던… 그 일이 바로 이때의 기억이구나… 자신을 이끌어줄 스승도 없는데, 혼자서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 생각했던 젤다… 그래서 찾아간 힘의 샘…


힘의 샘에서 달빛을 받으며 기도를 하다 소리칠 만도 하다… 싶었다. 그날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던 거였구나.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하이랄 왕... 하나밖에 없는 딸 젤다가 소중한 존재일 텐데도, 비정하다 싶을 정도로 꾸지람을 내렸다. 하이랄 멸망을 막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이가 젤다 공주기에, 딸이라도 몰아붙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시작의 대지에서 떨리는 눈으로 내게 젤다의 구출을 부탁하던 그 영혼과, 기억 속의 하이랄 왕이 동일인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나는 하이랄 성 지하의 도서실에 갔다가,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이랄 왕의 속내가 도서실 안에 숨겨져 있었다.


사실 나는 젤다 공주가 꾸지람을 들은 이 기억 때문에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라, 젤다의 연구실에서 내려와 하이랄 성의 선착장 방향으로 내려갔다. 하이랄 왕이 유물 조사를 금지해서 도서실 출입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 젤다 공주는 그 이후에도 틈이 나면 책을 몰래 찾으러 도서실에 드나들었다. 그 도서실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선착장에서 이어진다는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재앙 출현 이전에는 하이랄 선착장은 매우 붐비는 장소 중 하나였다. 하이랄 성 안으로 물자를 들이고 내는 데 편리해서, 많은 상인과 관계자들이 드나들었던 곳인데, 사람들에게 도서실에 드나드는 걸 들키면 곤란한 일이다. 그래서 젤다 공주는 변장을 하고 선착장에 호위들 몰래 내려가곤 했다.


이번에 선착장으로 들어갈 때는 몬스터가 혹시 있을까 봐 물에 들어가서 접근해 올라갔다. 리잘포스 몇 마리가 있었는데, 무시하고 재빨리 비밀 통로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 올라갔다.



계단을 올랐더니 키이스들이 숨어 있어서 하나씩 몽둥이로 두들겨 주었다. 다행히 그 외에 몬스터는 없었는데, 조금 더 올라갔더니 커다란 횃대가 있는 넓은 터가 나타났다. 100년 전에도 이곳은 이렇게 텅 비어 있었다. 한 번은 젤다 공주가, 불이 밝혀지지 않은 커다란 횃대는 어째서 불을 붙여놓지 않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그게 생각나서, 작은 횃불에서 불을 옮겨다가 화살로 큰 횃대에 불을 붙여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다른 방향의 땅이 흔들리고 아래에서 사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에도 불을 붙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쨌든 사당에 들어가 봤더니, 힘의 시련 상급 사당이었다. 무기만 충분하다면 도전해 볼 만한 사당이기에, 가디언을 상대하고 났더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사당 뒤편으로 나 있는 계단을 오르면 비밀 통로가 나온다. 도서관으로 통하는 이 비밀 통로를 알게 된 것은, 밤에 젤다 공주가 변장을 하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걸 목격한 일 때문이었다. 그날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젤다 공주가 방으로 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 다른 일을 챙기러 훈련소에 갔었다. 생각보다 훈련소의 일이 오래 걸려, 늦은 밤에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는데... 젤다 공주의 방 근처로 일부러 돌아갔다가, 시녀 복장으로 밖에 나온 젤다 공주를 발견했다.


젤다 공주는 내가 그를 발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재빨리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그를 미행했다. 그렇게 젤다 공주를 쫓아가보니 다다른 곳이 선착장 제일 깊은 곳에 있는 이 통로 앞이었다.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살짝 댔는데, 너무 소스라치게 놀라서 오히려 미안했었던 기억도 났다. 젤다 공주는 살짝 화가 난 것 같기도 했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차라리 잘 되었다며 문을 열어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도서실의 비밀 통로는 원래, 다른 구조물로 가려져 있어 남들은 잘 모르고, 하이랄 왕족들만 아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항상 잠겨 있지 않았던 이곳의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이었다.


도서실 출입을 금지당한 것을 알고 있기에, 젤다 공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괜찮겠어요...? 하니, 젤다 공주는 뾰로통한 얼굴로, 책을 몰래 보는 걸 들켰으니 비밀, 지켜 주셔야 해요...라고 속삭였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어쩔 수 없이 주변에서 도구를 찾아 문고리를 망가뜨려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맙다면서 내 손을 꼭 잡아 주고는 도서실 안으로 들어갔던 젤다 공주의 모습... 괜스레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고 나는 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밖을 지켰었던 기억...



지금의 비밀 통로는 재앙 때 하이랄 성의 난리통 때문인지, 다른 구조물로 숨겨져 있지 않았다. 철제 상자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철제 상자를 치우고 문을 열려고 해 보았는데, 문이 아니라 다른 것이 놓여 있었다. 밀어 봤는데 꼼짝하지 않았고 꽤나 무거워서 이게 뭐지? 하고 시커 스톤을 켜 보았는데... 철로 된 물체였다.


시커 스톤으로 그 물체를 옮겨 안으로 들어왔더니... 그 철제 구조물의 정체는 도서실의 책장 사이에 놓인 가벽이었다. 이 무거운 것을 젤다 공주는 어떻게 옮기고 들어갔던 거지? 100년 전 당시엔 이 가벽으로 막혀 있진 않았나 보지?



도서실에 들어왔더니 리잘포스 한 마리가 그 큰 두 눈을 부라리며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나를 발견하고 공격하려고 하기에, 철제 구조물로 시야를 가렸다가 타이밍을 봐서 선제공격을 했다. 리잘포스는 크게 저항하지 못하고 금세 쓰러져 사라졌다.


나는 다른 철제 가벽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시커 스톤을 켜서 여기저기 가벽을 열어보았다. 그랬더니... 숨겨진 방이 하나 드러났는데, 그곳은 왕의 서재였다.



왕의 서재에는 하이랄 왕의 수기가 놓여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필요에 의해 기록해 둔다 밝힌 그의 짧은 수기는... 젤다 공주와 연관된 것이 많았다.


6살에 젤다 공주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6살이라니! 내 예상보다 너무 어리다... 그렇다면 7살에는 수행을 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인 건가? 말도 안 돼.... 하지만 젤다 공주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의연하게 눈물을 참으며 대견한 모습을 보였다...


수행을 시작해야 할 시기가 되어 젤다 공주는 여러 샘을 방문하여 오랫동안 기도를 했지만, 바라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하이랄 왕이 답답해하는 가운데 젤다 공주는 봉인의 힘을 깨우기보다는 유물 조사를 하는 것을 더 좋아해, 하이랄 왕은 공주에게 꾸지람을 여러 번 내렸다. 겉으로는 젤다에게 따뜻한 말을 하지 못했지만, 수기에는 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글을 적어두었다. 딸을 어떻게 하면 잘 키울 수 있을지 고민도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혜의 샘 - 마지막 수행 장소 -로 젤다 공주가 떠났다는 전갈을 받고, 그곳에서 돌아오면 젤다 공주와 다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자신도 딸에게 매정하게 대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수행의 결과가 이리도 없다면 젤다 공주가 좋아하는 방식을 인정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재앙 가논 때문에 만나지 못하고 그대로... 죽음으로 헤어졌으니...

수기의 마지막을 읽어 내려가는데 콧날이 시큰해졌다.


나중에 젤다 공주를 구하게 되었을 때, 이 수기가 여기 있다고 알려 주면 더 마음 아파할까? 그래도 알려 주는 게 도리지 않을까.....



나는 그 후에 도서실 위로 올라가 하이랄 성 내부에 숨겨져 있는, 공격력 높은 무기들을 챙겼고 근위복 같은 복장도 찾아냈다. 기대보다 많은 무기가 있어서, 다 챙기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이래서 하이랄 성에 가면 한탕 챙겨 나올 수 있다고 트레저 헌터들이 호언장담을 했었구나.



예상은 했었지만, 기대보다 과거의 기억을 더 많이 마주할 수 있었던 하이랄 성이었다. 어쩌면 젤다 공주와의 추억이 가장 많은 장소가 아닐까. 사진기의 기억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찾을 수 있었던 기억에 - 이제 점점 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100년 전의 나는 분명... 하이랄 성의 기사였고, 영걸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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