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너무 달라, 한국 vs 미국 (4)
딱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한국 땅에 닿았다. 2019년 12월 25일, 뉴욕 JFK에서부터 15시간 비행 이후 인천공항에 도착! 다행히 시차적응이 필요한 것 빼곤 크게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했던 마음. ‘나는 괜찮아도 아기는 놀라거나 불편했을 수 있으니’ 한국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아침, 미리 예약해뒀던 산부인과로 향했다. 미국에서는 산부인과 첫 방문까지 2주 정도 기다렸던 것 같은데 한국은 예약, 방문 절차가 참 빨라서 좋다. 미국 OB/GYN만 드나들다 보니, 내심 이곳의 병원 분위기는 어떨지 방문 전부터 내내 호기심이 싹텄다.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북적북적 와글와글,
대기가 길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만
아무리 아침 일찍 예약을 잡고 방문을 해도 꽤나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를 들어왔던 터였다. 한켠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출산율은 낮다는데 산부인과 대기는 도대체 왜 이렇게 긴 거냐"는 볼멘소리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휴일 바로 다음날 아침이어서였을지,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임산부들로 대기공간이 빈틈없이 꽉꽉 들어찼다. 물론 병원 운영규모나 지리적 위치, 담당의 수에 따라서도 병원 곳곳마다 참 다양한 풍경이 펼쳐지겠지만! 철저히 예약 시간제로만 운영되는 미국 병원에서는 기다릴 필요가 없었던 게 사실. 늘 한가로웠던 병원 풍경, 다른 임산부와 자주 마주칠 기회가 없던 것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꽤나 오랜 기다림 덕분에 이런저런 '사람 구경'의 재미를 봤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임산부, 게다가 '한국인' 예비맘들을 한 공간에서 마주하니 불쑥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던 게 첫 마음.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닌데도 같은 느낌을 공유하는 같은 나라 출신의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인 자리라니! 워낙 다양한 인종이 얽혀 살아가는 미국인지라, 같은 단일 민족 임산부가 한 자리에 있단 사실만으로도 그저 눈물 나게 반가웠다. 뭘해도 ‘친근하고 편안한’ 모국에서 계속 진료받고 출산까지 이어갈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부러운 심경이 촤르르 밀려들던 순간. 이런저런 감정이 교차하는 사이,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 순서 짠!
한 마디 한 마디, 녹아드는 시간
다정다감 전문의와 꿀 상담
미국에서 방문해왔던 OB/GYN이 불친절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처음 어리바리 산부인과를 찾았을 때부터 20주차를 넘겨 꾸준히 방문하기까지 그들은 늘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이방인 산모를 돌봐주었으니 그저 감사했을 따름이다. 때때로 영어가 꼬여서 궁금한 사항을 서툴게 질문하더라도, 정확한 산부인과 용어를 몰라서 돌려 돌려 이야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안심시켜주려 했던 미국에서의 의료진들.
하지만 모든 과정들이 나의 제 1언어로 다가오지 않아서였을까. 정기검진을 가서 상담을 받을 때나, 초음파를 볼 때, 왠지 모르게 '건조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아기와 나의 몸상태에 대한 철저한 팩트 체크에 충실했을 뿐, 예민한 타국 출신의 임산부를 정서적으로 어루만져주지는 못한다는 느낌? 물론 당연한 일이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걸.
역시 모든 게 모국어로 이뤄지니 겁날 게 무엇이랴. 혹여 중요한 내용을 놓칠까봐 조바심일 날 것도 없다. 미국에서는 '베이비', '보이'로 지칭되어왔던 뱃속의 존재.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우리 아가'라고 불러주시고 태명까지 친히 언급해주시니 괜히 더 사랑받는 느낌이랄까. 초음파 영상이 한 순간 한 순간 지나갈 때마다 꼼꼼하게 설명해주는 것도 은근한 감동 포인트였다. (이 역시 병원 차, 담당의의 개인 성향 차는 있겠으나,) 미국에서는 굳이 감탄사를 곁들여 가며 아기 초음파 한 순간, 한 순간에 온 힘 다해 정서적인 리액션을 더해주진 않았던 것 같다. 아기의 성장을 최대한 담백하고 치밀하게 판단해주는 데 집중한다는 느낌이 강했을 뿐. 아! 진료를 마치고 동영상을 실시간 공유해 볼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 역시 참 고맙다. 미국에서도 여러 장의 초음파 사진은 득템 할 수 있었으나, 한국에서처럼 실시간 업로드되는 동영상 앱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었으므로. 역시 한국이구나 싶은 순간 중 하나.
나도 드디어 산. 모. 수. 첩. 득템
한국에 와서 가장 받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산모수첩, 그리고 임산부 배지. 사실 특별할 건 없는데 또래 친구들이 하나같이 지니고 있던 것을 여러 해 지켜봤던 덕분일지, 괜히 나도 한번 소장해보고 싶었다. "이건 꼭 가져야 해!" 임산부의 심리적 안정을 도와줄 아기자기한 소품의 역할을 해주기라도 하는 걸지... 마치 기념품이라도 되는 듯이!
한국 입국 직후, 그리고 미국으로 출국 직전, 단 두 번 방문했던 병원이었기에 지속적인 기록은 불가능했음에도, 핑크빛 산모수첩은 설렘 그 자체였다. (이 수첩은 차후 한국 방문 때, 아기 예방접종에도 귀하게 쓰였다) 이 작은 수첩 덕분에 가까운 전철역에서 또 한 번 임산부 배지도 득템 할 수 있었다. 20주차가 한참 넘어서야 받은 수첩에 뒤늦게 두근두근. 허나, 차후 임산부 배지를 달고도 교통약자 배려를 받지 못할 때는 종종 부글부글 끓어올랐음은 안 비밀로 하겠다.
다 듣고 가고 싶잖아요
예비맘 출산교실
병원 규모에 따라 다르겠으나, 한국에서 잠시 방문했던 산부인과에는 다달이 임산부를 위한 교육프로그램, 이벤트가 참 다채롭게 짜여 있었다. "아, 다 듣고 가고 싶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심지어 이때는 코로나 대유행 직전이었으니까) 내가 머문 시기가 연말 연초였던 터라 이래저래 새해맞이 행사가 많아서였을지, 실제 내가 꼭 듣고 싶던 강의는 하필 개강 타이밍이 맞질 않았다. 무료로 진행되거나 소액의 참가비만 내면 들을 수 있는 강의가 대부분이라서 한국 임산부들이 마냥 '부럽 부럽'.
미국에도 예비 부모를 위한 출산교실, 혹은 모유수유 클래스가 병원마다 마련은 돼 있지만, 비용이 꽤나 상당하다. 한 달 전 수강했던 부부 출산교실의 경우 190달러에 달했던 수업. (물론 차후 보험사에 환급 신청을 해서 절반 가량을 돌려받을 수 있는데, 그걸 고려해도 저렴하고 만만한 금액은 아니지 싶다.) 기저귀케이크 만들기, D라인 파티와 같은 아기자기한 이벤트들도 탐이나긴 마찬가지. 서울 시내, 각 구의 보건소별로도 무료 진행되는 강좌가 꽤 있다고 하나, 이 또한 마음속으로 '찜콩'하기만!
그 외 이모저모
35주차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검진을 받아본 결과, 한국에서 진행되는 검진 시기와 절차는 용어만 살짝 다를 뿐 전반적인 흐름은 유사했다. 1차, 2차 기형아 검사 절차와 시기부터 임당 검사 등 각종 세부 검사에 이르기까지. 다만, 한국 산부인과에 방문해보니 초기부터 좀 더 '식단 관리'에 예민하라고 조언해주는 듯했는데, 미국에서는 '날 음식을 주의하라'는 것과 '커피는 하루에 한 잔만', 이 두 가지 원칙 정도만을 집중적으로 강조했었다는 것이 조금 달랐다.
워낙 음식에 대한 개인 알러지 사항에 예민하고, 음식메뉴에 대한 개인선호를 굉장히 뚜렷하게 존중하는 미국이다 보니, 딱히 개인의 식성과 취향을 제한하려 하지는 않는 듯했다. 이와 달리, 한국에선 뭔가 권고사항, 지침이 많아 보였다는 것. 잠시 두번 방문했을 뿐이지만 뭘 먹고 뭘 먹지 마라는 조언이 좀 더 또렷했다.
이전 글에서도 밝힌 적이 있지만, 미국에서는 굳이 철분제를 권하지 않아서 나는 엽산, 철분 등등의 영양소가 고루 함유된 종합비타민제 하나만으로 초기부터 출산 직전까지 잘 버텨나갔다. 하지만 역시 한국 산부인과에 가자마자, "철분제는 섭취하고 계시죠?"라는 말을 들었다. 다행히 내가 먹는 종합비타민제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한국에서도 들었으니, 문제 될 건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는 4D 입체 초음파를 탁탁 찍어볼 수 있어 좋았다는 사실. 미국 병원에서도 진행해주는 곳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아기 얼굴을 세밀하게 촬영한 건 한국에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못 하고 왔더라면 그거 참 섭섭할 뻔했다.
아기를 확인한 순간부터 아기를 낳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큰 틀은 다르지 않겠다만, 한국 산부인과와 미국 산부인과, 미묘하게 구석구석 다른 지점이 꽤나 있다. 아무래도 맘 편하고 접근성 좋은 한국 병원이지만, 의사로부터의 권고, 세부 지침, 조언 사항이 살짝 ‘잔소리 같이’ 많은 곳. 하지만 임산부를 좀 더 어루만져주는 듯한 따뜻함이 두루두루 깃들어 있는 분위기가 바로 한국이었다.
미국은 그와는 또 반대. 필요한 건 철저히 검사하고, 불필요한 건 굳이 예민하게 신경 쓰지 않는 느낌. (파르르 걱정하면서 가끔 불안 사항을 이야기해도 '별로 걱정할 필요 없다'는 식의 무던한 반응들이 대부분.) 진료 과정 전반적으로 모든 절차와 방침이 군더더기 없이 효율적이고 깔끔하게 딱딱 떨어지는 느낌. 그렇다고 불친절하거나 무관심한 건 아니지만 한국만한 포근함은 생략돼 있어 가끔은 아쉬울 때도 있던 미국 OBGYN.
한국 산부인과가
친정 엄마라면,
미국 OBGYN은 시어머니 느낌인 걸까.
진료과정 내에서도 미묘한 차이를 느껴왔을 진대, 아마도 출산과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때 더 뚜렷한 차이가 와닿겠거니 싶다. 세부적인 분만, 시술 방침도 다를 테고, 산후조리 개념이 딱히 자리 잡고 있지 않은 미국이라서 차후 산후회복에 관한 권장사항도 이래저래 다른 것 투성이겠지. 다르면 다른 대로, 비슷하면 비슷한 대로 '안전하고 건강하게' 출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 그 모든 다름과 닮음에 그럭저럭 또 적응해 나갈 수 있는 유연함을 잃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