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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Aug 16. 2018

기꺼운 멸망


 그는 나를 똑바로 응시한 채 "어린애"라고 했다. 사소한 것에 쉽게 설레어하고, 기뻐하며, 좋을 때는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소리 내어 한바탕 크게 웃어버리고, 슬픈 감정에 휩싸일 때는 감정에 도둑이라도 들어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물을 뚝뚝 흘리는 내가 그 사람의 눈엔 아이처럼 보인 것이다.


 "그렇게 살다 간 어른이 될 수 없어."


 마치 세상의 모든 감정을 통달하기라도 한 선인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뇌까리는 그를 잠시 말없이 바라봤다. 건조하다 못해 푸석거리는 그의 정감은 살짝 손가락만 가져다 대어도 바사삭 거리며 흩어질 것 같아 보였다. 그처럼 아무것도 품지 못하고, 아무것도 잉태할 수 없는 메마른 황무지가 되는 것이 성숙한 어른이라면 그런 것 따위는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렇게 사는 게 아니야."


 모래사장의 모래알을 헤아리듯 대리석이 마블링된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뒤에 이어질 말이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뭐라고 지껄이나 들어나 보자'라는 심판자의 근엄한 얼굴을 한 채였다.


 "창밖에 폭풍이 몰아 칠 땐 뛰어들어야지. 당장 겉옷을 훌훌 벗고 현관문을 박차야지. 쏟아지는 감정에 젖지 못하는 네가 뭐엔들 푹 절을 수 있겠어?"


 피식 김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속에서 여물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설익은 소리 잘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너처럼 사리 분별없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며 살다 간 인생 말아먹기 딱 쉬워."


 내가 이겼지?라는 표정으로 그가 웃으며 머그잔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아직도 블랙커피에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렇지. 망할 수도 있어. 근데, 넌 그 느낌을 평생 모를 거잖아."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 나의 신경전이 살짝 지루해진 듯 그가 노곤한 표정으로 나를 다시 치어다봤다.


 "감정의 한가운데로 뛰쳐 들어가서 쏟아지는 모든 것에 흠씬 두들겨 맞는 그 순간의 감각이 얼마나 황홀하고 꿈같이 느껴질 수 있는지 모르잖아? 이대로 휩쓸린다면 정해진 결말이 몰락과 괴멸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동안 쌓아 온 모든 자의식과 세계관이 뿌리째 흔들릴 걸 알면서도, 그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기꺼움을 평생 모를 거잖아? 파멸 속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울 수 있는지, 얼마나 설레고 흥분될 수 있는지 넌 모르잖아."


 퍼붓는 감정 속에 발도 디뎌보지 못한 네가 어떤 감정을, 어떤 생각을 잉태하고 뿌릴 수 있겠어. 결말 따위야 어떻게 매듭지어지든 상관없는 그 분위기 조차 겪어보지 못한 네가.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창 밖에는 새벽의 부스러기가 붉은색 가운을 입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태양의 발치에서 무언가 서운한 기색으로 주춤거리고 있었다. 곧 아침이 밝아올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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