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꼭 네 생각이 불쑥 떠오른다. 빗방울이 지상으로 곤두박질쳐 산산이 조각날 때마다 네 죽음을 오랜 예언 구절처럼 곱씹는다는 네가.
"누나, 내 속은 텅 비었어. 잔을 기울여도 쏟아질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거든."
너는 빗줄기 속에 희뿌연 담배 연기를 한숨처럼 그으며 내게 중얼거렸다. 그때 너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내 목에 가시처럼 걸려, 내내 까슬하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불안했다. 공기 중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너도 곧 부서져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얘, 네가 그만 아팠으면 좋겠다.
이런 시시한 위로의 말이라도 얄팍하게나마 건네줄 것을.
그러나 조악한 면직물 같은 단어들은 입술 끝에 매달려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다시 말려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나는 갈급증을 느끼는 네 옆에서 함께 모래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가만히 침묵과 함께 침잠할 수밖에 없었다.
얘, 네가 그만 울었으면 좋겠다. 얼굴에 눈물 묻었어.
그 아이는 울고 싶어도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잔을 아무리 기울여도 쏟아낼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 아이에게는 눈물 냄새가 말라붙어 있었다.
얘, 네가 그만 아팠으면 좋겠다.
차라리 네가 종이였으면 다정한 말을 쉬이 적어 내려갈 수 있었을까.
차마 맺히지 못한 말이 흐드러지지 못해 오늘 같은 날에 이다지도 서럽게 내 마음을 타고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