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글쓰기에 앞서, 개인적으로 나는 기독교 신자도 불자도 아닌 각 종교의 상이한 교리에 관심이 많은 개인주의자임을 밝히고 싶다.
오히려 그 교리서들과 율법서들을 큰 범위로서의 철학서처럼 들여다보는 편에 가깝다.
마치 성서를 인류에서 가장 오래된 베스트셀러라고 칭하는 말처럼 오랜 고전을 대하듯 그것들을 대한다.
어쨌거나 짧게는 수세기, 길게는 수십 세기를 살아남은 철인哲人들의 혜안이 맥락 사이에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하니까.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칼뱅주의와 불교 교리에 나타난 '신의 말씀'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고결한 삶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칼뱅주의의 특징이었지만, 이것은 심리적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칼뱅주의는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신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애써야 하고, 그 노력을 잠시도 게을리하면 안 된다. 여기서 신의 말씀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근저인 보편적 이상의 대변과도 같다.
불교의 교리와 확연히 다른 부분이 바로 여기다.
불교에서는 모든 선지식들의 말과 가르침은 ‘방편-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일종일 뿐, 절대적인 것이 아니므로 방편에 휘둘리지 말라고 했다.
절대적으로 어겨야 할 절대 불문율의 ‘신의 말씀’ 따위는 없는 것이다.
선지식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우리는 모두 부처이므로, 우리 안에 이미 모든 답이 구족되어 있느니.
다양한 수단(문자 혹은 구두)으로 표현되고 전해진 '신의 진리'는 그 잠든 부처를 깨우기 위한 일종의 변죽 울리기 일 뿐, 그 자체가 참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불가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나오게 된 연유이다.
... 나는 과거 계율에 마음을 두었고, 또 경론을 연구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들이 세간을 구제하기 위한 약방문이며 드러내어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일시에 버려 버렸다...
-임제록 中
법에 맞는 올바른 견해를 얻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미혹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 안으로 향하건 밖으로 향하건 만나는 대로 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 권속을 만나면 친척 권속을 죽여라.... 이렇게 되면 사물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될 것이다.
손가락에 휘둘리지 말고, 그 수많은 손가락들이 가리키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달아라.
왜냐?
내가 찾는 물음에 대한 답은 바깥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으므로.
*참고 도서 및 칼럼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