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자락. 나는 낮과 밤 사이의 낯선 진동수 사이에서 머뭇대고 있었다. 깨지기 쉬운 경계의 긴장감. 미련이 남은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태양, 그 역시 산마루 틈으로 삐죽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불안에 쫓겨 낯선 골목길로 내달 음질을 친다. 머뭇거리다간 산산이 조각난 파편에 폐부가 찔려 신음하며 스러져가게 될지도 몰랐다. 아아, 물들어 번지는 멸망이여. 하루의 절멸과 함께 바쳐지는 나의 몸뚱어리는 번제 의식의 새끼 염소와도 같이 무력하고 애틋하구나.
그날따라 나는 ‘모종의 이유로’ 평소에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정확한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늘 귀갓길로 애용하던 길이 공사 중이었던가? 안 그래도 요새 중국발 미세먼지다, 전염병이다 공기 중에 해로운 물질이 차고 넘치는 마당이었다. 융털의 모세 혈관에 공사장 석회 가루까지 묻히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염은 충분했다. 나는 이미 세상의 온갖 것들에 의해 더럽게 물든 단풍. 위태로이 앙상히 뼈만 남은 가지에 매달린 채 가드라뜨린 제 어깨를 한껏 끌어 안고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이제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 이제 ‘모든 것은 우연처럼 시작되었다’라고 이어서 쓸 차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나는 망설인다. 텅 빈 백지 위. 복병처럼 숨을 사린 채 기다리고 있던 턱에 탓,하고 걸려버린다.
삐틀삐틀.
삐칠삐칠.
나는 눈먼 장님처럼 백지 위를 더듬거린다. 마침내 무언가 손 끝에 걸려왔다. 이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고, 그저 우연을 가장한 필연만이, 정해진 운명 만이 인간들의 머리 위에 올가미처럼 드리워져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것이 이 심연 가운데 불쑥 솟아 있었다. 낮과 밤 사이의 경계에 걸려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요철들을,
가만가만,
슬금슬금,
쓰다듬어 본다. 괜스레 눈물을 묻히기는 싫은데.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나는 우연인지 운명일지 모를 미지의 길로 접어든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