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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Jun 26. 2021

비를 맞아 더 좋았던 제주 섭지코지

회사원의 짧은 제주 여행 ep1.

이번 제주 여행에서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 묻는다면, 쏟아 붓는 비바람 속에서 섭지코지를 걸었던 일을 말할 것이다.


보통의 경우, 비를 맞지 않는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촉촉히 내리는 이슬비에도 꼭 우산을 써야 한다. 산성비를 맞으면 머리가 빠진다는 초등학생 시절의 교육 때문인지 뭔지, 맞으면 안된다 비는 무튼.

잠시 미국 시골에 살았던 시절, 미스트같은 비에 꼭 우산을 쓰는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던 기억이 있다. 작은 비에는 우산을 쓰지 않고 그냥 비를 맞는 그 곳 사람들을 보며 '쟤들은 참 자유로워' 보인다면서도 항상 손바닥만한 우산은 챙기고 다녔다.

29년의 인생동안 비는 그쳐야할,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런 내게, 2년 만에 가는 여행에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는 날 심드렁하게 만들었다. 다이소에서 우비를 사고 제주도에 비가 오면 갈 곳을 찾아보면서, 아직 가지도 않은 여행이 벌써 B컷이 된 것 같았다.


혹시, 예보가 틀린 것은 아닐까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예보처럼 여행 전 날부터 날은 흐렸다.

20인치 캐리어에 빔프로젝터, 간단한 옷, 샌들, 스킨케어 용품을 꾹꾹 눌러 담으며 이 계획없는 비오는 제주가 어떨 지 감이 오지 않았다. 완전한 초행길에 비까지 온다면 운전은 멀쩡히 할 수 있을 지, 아무런 계획없는 이 여행에서 시간만 허비하지 않을 지, 컨텐츠는 뽑아낼 수 있을 지.

비 구름이 상기시킨 채도 낮은 제주는 설렘보다 두려움이었다.


2박 3일의 짧은 여정에서 두 번째날.

하루를 온전히 외지에서 보낼 수 있는 유일한 그 날에 가장 많은 비가 내렸다.

숙소에만 쳐 박혀 있기엔 아쉬움이 분명한 그 날 아침. 무려 세 시까지 숙소에서 밍기적 댈 수 있었다. 비를 핑계로 그냥 오늘 하루종일 이 좋은 숙소에 머물러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 서귀포 홈플러스에서 사둔 쭈꾸미 밀키트와 귀리 곤약밥을 조리하고, 베트남산 용과를 썰어 우유 100%라는 요거트에 섞어 먹었다. 리조트 창밖에 보이는 키큰 야자수와 흐릿한 바다가 아니라면 이 곳이 제주인지 서울인지 알 바 아니었다. 하필 비가 온 덕분에 누리는 특별한 게으름이었다. 아니었다면 제주의 일출을 봐야한다며 새벽 부터 일어나서 바지런을 떨 계획을 세웠다가 9시쯤 눈을 떠서 자괴감이 들었을 것이다.


섭지코지를 간 것은 5년 전 들렀던 제주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매일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았던 취준 시절. 제주 창업 지원 센터에서 열리는 잡캠프를 담당했던 친구 덕분에 당시 비슷한 처지였던 대학 친구들끼리 제주를 가게 됐었다. 별 생각없이 쫓아갔던 지라 어느 바다를 갔는지 어느 가게를 갔는지도 뭐하나 기억나는게 없었다.

5년전 제주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선명한 곳은 섭지코지였다. 해질 녘 5시 즈음, 찬 바람이 불던 섭지코지 주변에서 길을 잃었었다. 잃은 일행을 찾을 생각도 잊고 지는 연보랏빛 하늘과 그믐달 아래를 하염없이 걸었는데, 그냥 좀 뭉클했었다.


꽤 괜찮은 직장에 취업을 하고도 여전히 계획없이 다시 찾은 제주.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에서 그 사이 제주는 훨씬 더 핫플이 되었고, 새롭고 더 좋은 곳을 찾을 법도 하지만 진부한 관광명소, 섭지코지를 다시 갔다. 결항이 될 정도로 비가 퍼붓는 날에 적당한 곳인지 뭔지는 알 리 없지만.


비가 많이 오는 날이지만 섭지코지의 주차장은 거의 만차였다.

처음 막 그 곳을 도착할 때는 다행히 그냥 좀 촉촉히 내리는 정도였다. 그래서 우산을 쓰고 나왔다. 점점 빗방울이 굵어지자 다시 뒤를 돌아 차로 왔다. 우비와 샌들로 갈아신고 다시 떠났다. 비를 피하러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반대로 비를 맞으러 들어갔다.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 괴짜가 된 것 같아 신이 났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기분 좋게 비를 맞을 수 있을까.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이 만큼 사람없는 섭지코지를 누릴 수 있었을까.


샌들을 갖고온 것은 우비를 챙겨온 것은 참 잘한 일이라 자축하며 마음껏 비를 맞으며 꺄르르 웃었다.

몰아치는 비가 눈으로 들어와서 시야를 가린다던가 우비를 뚫고 들어온다던가 바지가 젖는다던가 하는 것은 별로 중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물에 젖은 생쥐꼴을 하면서도 이런 꼬락서니를 보고 웃는 사람은 이 광경을 열심히 찍고 있는 저 사람밖에 없었다.

물이 젖어 축축한 느낌이 조금 낯설고 찝찝할 법도 했을텐데. 여행이라는 핑계를 대고 맘껏,

눈 내리는 겨울날 손이 시린 지도 모르고 눈을 뭉치고 던지며 깔깔대던 어린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비 내리는 제주를 오히려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적 변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여유 덕분일 것이다.


비는 맞지 않을 수록 좋다고 여기며 리스크와 변수를 피해왔던 내가.

비가와도 좋다고 느낀, 아니, 비가 와서 더 좋다고 느낀 내 인생 첫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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