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의 열정 비성수기 극복썰
드디어 일상이 기대되는 즐거운 일이 생겼다.
딱히 대단한 일은 아니다.
출근 후 초콜릿을 뜨거운 에스프레소에 녹인 후 우유를 부어 라떼를 만든다던가
레깅스와 크롭티를 입고 괜히 쫀쫀한 느낌을 즐기며 아침 산책을 한다던가
뜬금없이 차에가서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하필 거기서 책을 읽는다던가
딱 무리가 되지 않을 수준의 부담없는 사소한 행동이다.
별 거 없는 일상이지만
"내가 왠 일이지"라고 느낄 정도의 수준의 아주 작은 변화다.
그리고 이젠 열정 성수기 시절의 나를 70% 정도 되찾은 듯 하다.
지금보다 앞으로의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기대를 다시 느끼고 있다.
오랜 방황이었다.
일에 대한 욕구는 물론, 식욕이나 수면욕, 소통 같은 인간의 기본 욕구마저 바닥을 쳤다.
회사를 다니긴 했지만 영혼같은건 없이 돈 벌기위한 수단인진 오래됐고
남은 시간엔 주로 핸드폰을 많이 들여다 봤던 것 같다.
정보를 찾을 때도 있었겠지만, 남은 속여도 나는 속일 수 없지.
그야말로 시간 정신력 낭비였다.
너만 번아웃 온게 아니야, 누구나 다 찾아오는 번아웃 나는 이랬어
가 번아웃에 대한 나의 지난 절망편이었다면,
이번 글은 오늘의 희망편이다.
한 사람이라도 이 긴 터널을 좀 덜, 짧게 아파했으면 좋겠다.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고, 문제는 정의하기 나름이요, 관점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모 대기업에서 초고층 스포츠 센터 건립한다 하여
조망권을 침해당할 위기에 처한 아파트 주민들이 있었다.
보통은 시뻘건 글씨로 ‘초고층 스포츠센터 건립 결사반대!’ 정도의
붉은 페인트 냥냥한 전투형 태세로 대응했겠지만,
‘아이들이 햇볕을 받고 자랄 수 있게 한 뼘만 비켜 지어주세요’ 라는 카피로 현수막을 걸어서
여론상 역공의 상황이 발생했다고 한다.
- 카피라이터 정철의 강연 중 -
번아웃. Burn Out. 다 태워버렸다.
태운 것에 어떤 희망이 있나.
게다가 아웃이랜다.
회사에서 아웃하고 싶다.
난 번아웃 대신 "열정 비수기"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
성수기 시절의 텐션에 비해선 좀 흐물대긴 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지나갈 것 같다.
그저 여름이 지나 바다의 성수기가 끝났을 뿐, 다음 여름을 위해 해변가 리모델링을 할 수도 있고
겨울 바다의 매력도 좋다며 감성 마케팅을 해도 되는거다.
성수기 시절의 텐션을 평생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평생까지는 좀 그래, 늙어서 몸이 아픈 시기나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의 어린 시절을 뺀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사람이 신입이나 인턴 시절의 서툴지만 똘망똘망한 호기심 어린 눈을 몇십년 갖고 있겠어.
아무리 뜨거운 사랑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설렘과는 다른 관점으로 사랑하잖아.
누군가는 이것이 정신 승리가 아니겠냐고 고나리짓을 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소수의 사례를 가져와서는 이런 사람도 있다고 남들 하는 만큼 그대로 하면 어떻게 성공하냐고 채찍질 할 지도 모르겠다.
맞다. 합리화이자 정신승리. 내가 스스로에게 더럽게 많이 했던 마음이기도 하고.
그런데 완벽주의, 강박증, 자기 성찰, 성취 지향적 성향의 사람들이
아무래도 번아웃의 골이 더 깊을 것을 고려해보면
"비수기를 허하는 마음가짐"을 일단 먼저 가지는 것이
조금이라도 먼저 터널밖을 나오는 데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단 나아" 아주 자주 하던, 듣던 소리다.
번아웃 초기엔 '이건 나답지 않다며' 뭐든 하려고 아둥바둥 댔다.
정체되면 도태될까봐 불안했으니까.
속사정을 모른다면 남은 열심히 사는 나에게 대단하다고 박수치기도 했다.
사실은 속빈 강정이었는데.
얼마 가지 않고 들이는 노력에 비해 성취가 즉각적이지 않자 무단 중단 시켰고
하다 만 것이 쌓일 때마다 찜찜한 부채감이 상당했다.
그리고 이것도 일종의 회피라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실패를 보이고 싶지 않은거지.
실패하지 않을 만큼의 아이템만 찾아서 하다 갈아탔던 거지.
정말 성공하고 성취하고 싶다면 낙담의 골짜기를 견디고
남이 뭐라하던 말던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던 말던 냅다 들이미는 우직함이 필요하거늘
아무것도 안하는 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단, 이는 막 살아버리라는 것과는 좀 다르다.
(물론 이도 해봐야 소용 없다는 걸 깨닫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정말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그냥 냅다 침대에 누워있다고 해서 그게 휴식은 아니다.
침대에 누워서 인스타를 뒤적거리며 행복한 순간의 남의 인생을 보고 자신과 비교한다던가
연예나 정치 기사를 의미없이 넘겨보면서 욕하고 있다던가
이런건 휴식이 아니다.
하루종일 누워있어도 이상하게 피로가 안풀리고
계속 잠만 자고 싶다면 휴식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에게 필요한 휴식은 정신과 생각이 쉬는 휴식이다.
여건이 된다면 여행이 제일 가장 좋다.
여건이 안된다면 좋아하는 운동복과 신발을 신고 동네 공원이나 앞산을 가보자.
그조차 귀찮다면 좋아하는 향을 공간에 채운 후 유튜브에서 가이드 명상을 틀고 하루 5분만 따르자.
숨만 쉬는 명상이 취향이 아니라면 요가 영상 틀어놓고 요가 해라.
세상에서 가장 건전한 회피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이다.
가끔은 남들 보는 글이 아니라 배설 목적의 의식의 흐름의 글을 어딘가에 싸지르자.
이도 저도 다 귀찮으면 기분 좋게 샤워하는 것도 휴식이다. 이 때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꼭 바로 적어두자
내가 열정 비수기의 늪에서 벗어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트리거는
내 핸드폰에서 인스타를 지운 것이다.
관종력과 관음증이 냥냥한 나는 여전히
호캉스를 간거나 여행을 갔다는, 콘서트를 갔다는 자랑스런 사실을
은밀하게 대놓고 담은 예쁜 이미지를 남에게 전시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기는 하지만...
인스타를 삭제 한 지 약 한 달.
<올 해 가장 장한 일 어워즈>를 한다면 인기상 정도를 받을 기특한 일이다.
인스타를 삭제했다는 것은
정신력을 낭비하지 않으리라는 간절한 소망이자 다짐,
그리고 비워냄으로서 삶에서 진짜 중요한 일을 찾겠다는 상징 같은 거였다.
인스타를 지우자, 좀 더 내 시간과 정신적 리소스를 주체적으로 쓰는 데 도움이 됐다.
인스타는 철저히 "남"이 포커스된 매체다.
타인과 나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나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으로 본다.
타인의 편집된 이미지를 보고 나의 꼬질함과 비교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내 인생의 성수기 에디션을 타인이 관찰하는 피드백은 즉각적이고 중독적이었다.
도파민 자극이 내 뇌를 적당히 지배한 나머지
시간의 빈틈을 못견디고 습관처럼 앱을 들어가 짧은 시간을 여러 번 낭비했다.
삭제 버튼을 누르거나 홈 버튼을 누르기가 묘하게 힘이 들었지만 눈 딱감고 하고나니
타인으로부터 자유함은 물론, 성취감까지 있었다.
물론 마케팅 / 브랜딩 목적으로 인스타를 사용하는 것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일단은.
인스타를 지우자 자신감이 붙은 나는
나를 제일 매혹해오던 가장 중독적인 SNS, 블라인드를 지우는 지경까지 온다.
햐 정말 블라인드는 쉽지 않았어.
블라인드는 회사나 업계의 정보를 날 것으로 먼저 알 수 있었던 데다가
사회에서 가장 나와 비슷할 법한 '머기업 직장인' 범주에 있는 사람들이 포진되어 있던 지라
유튜브에 요리 레시피를 검색하는 것 만큼이나 나에겐 정보 검색의 큐레이션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비웃겠지만 사실이다. 이건 아주 용기있는 고백이라구?
회사 동기가 요즘 회사 블라가 개꿀잼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다시 설치할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온전히 나에 집중하는 시간에 대해 훈련 중인 나는
치고 나오는 금단증상과 충동을 애써 눌렀다.
지루한 침묵을 아무것도 안하는 그 순간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정신과 생각이 쉬는 휴식의 연장선이며
어지러운 것을 걷어낼 때 비로소 진짜 나를 볼 수 있다.
인스타와 블라인드 삭제는 하나의 상징으로 제시했지만,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리즘'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다만 항간의 미니멀리즘이 너무 인테리어나 물건에 치중한 느낌이 있어서
그보다 더 실천하기 가볍고 효과도 좋은 중독앱 삭제를 제안해봤다.
적절한 휴식과 비우기가 다시 올 성수기를 준비하기 위한 밑바탕을 까는 작업이었다면
그 바탕에 이제 무엇을 채우기 시작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 습관과 루틴의 영역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한 글에서 설명하긴 어려울 것 같아서 별도의 시리즈로 빼야할 것 같은데...
(나중엔 템플릿 까지 만들어 보려고 한다. 셀프 워크샵 하기 딱이다)
일단 습관 관련된 책 딱 두 권만 추천하겠다.
* 아주 작은 습관의 힘(Atomic Habits) - 제임스 클리어
* 습관의 디테일(Tiny Habits) - BJ 포그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두 책은 대략 비슷한 골자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습관을 작은 단위로 나눠서 행동에 옮기도록 시스템화 하라는 거다.
이 글에서 자세하게 적긴 좀 어렵지만, 예를 들어 내가 실천한 건 이런거다.
내가 만약 글을 쓰고 싶어. 써야 할 것 같아. 그러면 일단 저녁 먹고 책상에 앉는거만 한다던가
운동 하기 싫으면 운동복 먼저 입는걸 목표로 하자.
운동을 해야돼. 오늘 하기 힘들면 스쿼트 10번이라도 해. 아무것도 안하는 거보다 나아.
내가 좋아하는 샤워하는 시간 전에는 운동 하는 시간. 운동 후 샤워라는 루틴을 묶는거야.
무슨 성공한 사람들의 구전처럼 들려오는 미라클 모닝이라던가 이런건 솔직히 당장 실천하기 어려울 뿐더러 체력이 바치는 비수기 전사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꼭 대단한걸 루틴으로 짜지 않아도 된다.
이 글의 맨 앞에서 말했듯,
나는 출근해서 텀블러를 씻고 아이스카페모카를 만드는 것을 루틴으로 자리잡았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작지만, 일상의 즐거움을 주고 감각을 깨우는 루틴을 자리잡는다면
머지않아 열정 성수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학창 시절에 공부할 때도 그랬고
인생이 좀 얄궂은 것 같다.
인생의 함수가 노력과 비례형이면 좋으련만
러닝커브가 계단형이듯,
인생도 계단형이다.
한 순간의 대박이 있을거라는 의미보단,
당장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우리가 성장하지 않고 있다는건 아니라는거다.
아직 성수기 시절에 열정 미치던 시절로의 도달은 좀 남긴 했지만
꽤 오랜 기간 여러 시도를 하며, 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열정 비수기, 번아웃을 보냈고
그 별거 없어보이는 순간 순간이 쌓여서
정말 어느순간 정말 어느날 딱 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약없이 혼자 힘든 시간을 버텨야 할 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당신이 정말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좋은 음악과 좋은 향,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긴 시간을 버티다 보면
어느날 아침, 비수기에서 성수기로 계단을 오르는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