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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Nov 20. 2021

ENFP가 3년 간, 매일 일기 쓴 실험

문과지만 엑셀로 일기 쓰는 이상한 사람

늘 꾸준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할 줄 알았지만

어느 것 하나 최고가 될 수 없었고

시작은 많지만 맺음은 드물었다.


누가 보면 못하는 것 없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지만

내가 볼 땐 결과 없는 사람이었다.


재밌는 것이 많은 이 세상에서 난 늘 유목민이었다.

어느 것 하나 깊게 파는 스페셜리스트는

내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스페셜리스트를 동경하는 제너럴리스트.

자주 날 이렇게 설명했다.


회사생활을 하는 자체가 기적같은 ENFP

그 중에서도 P가 대문자인 나는 늘 즉흥적인 천성탓에 규칙에 얽매이는걸 정말 좋아하지 않았다. 진득하게 파기도 전에 어디로 튈 지모르는 내 천성을 이성으로 붙잡느라 어른이 되어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계획과 꾸준함은 내가 가꿔야할 어떤 스탯이었다.


2019년 1월 1일

딱 세가지만 꾸준히 갖고 가자고 다짐했다.

"일기, 독서, 운동"

운이 좋게도 이 세 가지 모두

3년이 지난 오늘까지 딱히 저항없이 내 습관이 되었다.

이 방법 저 방법 거치고 난 후엔 나름대로 내 스타일이라는게 생겼다.


일기.

일기의 시작은 의무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 그리 학교에서 일기를 검사받고 밀리면 채무감이 들어야 하는지 조금 의아스럽다.

일기가 힘들었던건 아마 그 시작이 숙제였기 때문이리라.


일기가 가벼워지기 시작한 건 내 안의 선생님: 마치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어 예쁜 것만 예쁘게 적어야 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부터였다.


일기를 쓰기로 마음 먹은 초입의 목표는 단순했다.

그저 꾸준히 기록하는 습관을 들일 것.

누군가가 나의 정체성을 물었을 때 힘이 될 만한, 시간의 무기를 하나 마련하는 것.


포맷같은건 없었다.

그냥 점이라도 쓰는게 목표였다.


외마디 욕만 적은 날도 있었고

일이 정말 힘든 버거운 날엔 솔직히 밀리기도 했고 날짜만 적고 스킵하기도 했다.


별다른 목적없이 매일 일기를 쓰는 일은 지속하기 어려웠고,

다양한 형태의 일기를 실험해왔다.



역시 클래식한 종이와 펜?

오래 쓰지도 못할 스벅 다이어리를 받기 위해

프리퀀시에 집착하던 나를 반성한다.

아무래도 종이에 쓰는 클래식한 일기는 쓰는 과정 자체에 드는 의식 자체는 효과적이었지만

글씨가 흐트러진다던가, 몇 번 건너뛰거나 하면

아예 쓰기가 싫어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지속적으로 쓴다는 가정 하에, 일기량이 쌓이면 원하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워서 휘발되는 느낌이기도하고.

무튼 이과같은 문과인 나한텐 안맞았던게 다이어리다.


Pros: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다. 손 맛도 있다.

Cons: 갈 수록 지저분해져가는 나의 기록을 회고하기 싫어진다.



Paletto

아날로그는 IT 종사자인 내게 맞지 않는다는 어설픈 가정을 경험한 후에는

일기나 기록을 위한 서비스는 어떤게 있을 지 찾아 헤매는 유목 생활을 좀 했었다.

그러다가 그냥 예쁘다는 이유로 정착한 서비스가 팔레토라는 앱이었다.


굳이 남의 서버가 아니라 로컬에 데이터를 저장하는 폐쇄성도 내겐 좋았고

내가 원하는 사진 위해 적당한 글만 쓰면 폰트나 레이아웃등을 적당히 조절해서

그럴싸한 이미지가 나오는게 맘에 들었다.

태그 기능도 있어서 원하는 기록을 쉽게 불러오는 것도 좋았다.

그러나 로컬에 일기 데이터를 저장하는 속성 탓인지

기기를 변경한 후에는 레이아웃이 깨져서 계속 사용할 수 없었다.


Pros: 예쁘다

Cons: 기기를 바꾸거나 잃어버린다면



엑셀로 일기쓰기

나는 데이터 쟁이로서, 테이블 형태의 정보에서 변태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엑셀로 일기를 썼던 적이 있다. (정말 안타깝게도 원드라이브 구독이 끊기고 나서 사라진 레퍼런스....)

인생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다 보면

내가 어디에 많은 정신을 쏟고 사는지,

누구랑 많이 만나는지

언제 좋은 감정을 느끼는지 알기 위해서 시작한

일기... 라기보단 나에 대한 정량/정성적 데이터 수집이었다.

meetup: 누구를 만났는지, 거기서 뭘 느꼈는지
think: 어떤 생각을 했는지
feel: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achieve: 성취한 것이 뭐가 있는지
health: 그날의 건강에서 느낀 특이점
weather: 날씨
etc


행(row)에는 각종 일상에 적어야할 것이 생길 때마다 아래로 적어 내려갔고,

열(column)에는 인생만사의 카테고리를 추가하며, 각 셀에 5점 척도로 점수화 하며 적었다.


그리하여 어느정도 내 일상에 대한 데이터가 쌓이면 어떤 것들에 5점을 줬는지

어느 날의 점수가 높았는지, 그런 날들의 특징이 뭔지 나름대로 분석했다.

게다가, 요즘엔 웨어러블 디바이스로 시시각각 내 심박수와 스트레스를 자동으로 측정 중이니,

날짜 데이터를 기준으로 매핑하면 여러 요소들의 상관관계를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 때는 열심히 했던 엑셀 일기였지만, 결국 한 달을 겨우 넘기고선 중단하게 됐다.


Pros: 남들은 안하는 거니까 특별한 느낌을 느낄 수 있으며, 꾸준하고 정확하게 기록할 수만 있다면 나에 대한 연구자료로 쓸 수 있다.

Cons: 꾸준히 쓰기 힘들다. 점점 대충하게 되며 본디 목적과 달리 분석 데이터로 활용할 수 없을 지경에 온다.



인스타 일기

올해 초에, 비워내는 습관이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비움 일기라는 인스타 채널을 비밀리에 열었었다.

더 중요한 것을 남기기 위해, 미련이 남아도 떠나는 것들이 더 좋은 것들을 버려내는 용기로 시작했지만

점점 영수증같은 것들만 버려내다가

과자 봉지같은 것들을 억지로 버리다가

크레센도가 아닌, 디크레센도의 과정이 너무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그냥 접게 되었다.


무엇보다 인스타로 일기써야한다는 핑계로 들어왔다가

결국 스크롤을 좌우로 위아래로 넘겨 남의 삶을 관음하는 내 자신을 보며

일단 이 플랫폼은 멀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인스타 일기는 접게 되었다.


Pros: 컨텐츠가 쌓여 운이 좋다면 그 것이 내 포트폴리오가 될 수 있다.

Cons: 인스타의 역기능과 함께 한다.



3년간 결국 정착한 일기 방법


3년간 삽질을 통해 정리된 일기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1. 기록의 용이성: 일기는 결과보다 과정의 성격을 가지므로 표현이 정돈될 필요는 없으며 쉬워야한다.
2. 최소한의 심미성: 그렇다고 지저분해선 보기 싫어진다.
3. 회고의 구조성: 일기가 과정에서 결과로 도약하는 힘은 회고에서 온다.


나는 Dynalist라는 아웃라이너 서비스를 이용해서 일기를 작성하고 있는데(Notion을 Dynalist보다 먼저 알았더라면, 노션을 썼을지도 모름)

아웃라이너 앱을 이용해서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내가 느낀 일기의 조건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1. 기록의 용이성: 프로그램 자체가 가볍기도 하고, 플랫폼을 가리지 않아서 어디서든 쓸 수 있고

2. 최소한의 심미성: 대충 써도 정리하기가 쉽고 미니멀하여 보기에 깔끔하고 가볍고

3. 회고의 구조성: 보기엔 미니멀하지만 태그 기능, 마크다운, 아웃라이닝 기능을 통해 구조화하기가 편하다


사실 일기보다는, 내 삶에서 느끼는 여러가지 상념과 사건들을 모아놓는 짧은 아카이브같은 곳인데

특히 태그기능을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매일 들은 말 중에서 공감가는 말이 있다면 #quote #사람이름 라는 태그를 달고

만나는 사람은 #meetup #사람이름 을 달고

오늘 성취한 것이 있다면 #achived

시작하는 것 #start

처음인 것 #first

깨달은 것 #realize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health

감사한 것 #thanks

정말 기억하고 싶은 것에는 #legendary를 달고

감정에 대해 토로하거나 남기고 싶다면 #feel #어떤 감정(불안, 질투 등등)

맛있는 걸 남기고 싶다면 #JMT

발견한 것은 #discover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 #will

꿈꾼 것 #dream

떠오른 아이디어나 잡생각 #spark

읽거나 시청한 것 중에 남기고 싶은 것 #read #book #watch #movie

글 쓰는 것에 관해서는 #write #brunch

해결해야 할 / 해결하고 싶은 질문들 #quest

기타 등등...


인생에서 일어나는 각종 일에 대해 즐겁게 기록하고 있다.

물론 나도 사람이니 모든 것을 적진 못하고... 때론 사실 자주 빼먹긴 하지만

힘이 되는 말이 필요할 때는 #quote로 찾아서 보고

누구를 최근에 언제 만났더라 싶을 땐 #meetup #사람 을 검색하고(세상에 중복 태그 검색이 된다구)

올 해 시작한 일들이 뭐가 있더라 싶으면 #start #first 를 찾아본다


일기의 포맷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한 때는 그냥 날짜 아래에 구조 없이 쭉쭉 한줄로만 내려 갈길 때도 있었고

요즘에는 카테고리 몇개(오늘 일어난 즐거운 일(외부 관점), 오늘을 잘 만들기 위해 내가 시도한 것들(나 관점, 내일 할 것, 내게 할 질문) 를 구성해서 자기 전 / 출근 시 쓰고 

종종 좋은 말을 들었거나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중간에도 태그를 달아서 기록한다.



매일 기록하는 루틴을 만드는 나만의 꿀팁

일기가 숙제 같은 느낌이 강해서 밀려 쓰는 세월이 당연히 있었다.

지금은 일기 쓰는 시간은 내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즐거운 루틴이 되었다.

아무리 야근으로 피곤해도 짧게라도 꼭 쓰고 잔다.


[자기 전 기록 루틴]

1. 자기 전 일기 쓸 곳에 좋아하는 향을 발향한다. (나는 아로마 오일 디퓨저를 쓴다)

2. 전자렌지에 핫팩과 물을 담은 머그컵을 넣고 3분정도 전자렌지를 돌린다.

3. 돌리는 동안 일기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4. 짧을 땐 그 3분 정도 안에 기록을 마무리할 수 있고, 3분이 끝났다는 신호를 전자렌지가 보내면 전자렌지에 있는 핫팩과 머그컵을 꺼내서 몸을 뎁히고 차를 우려 마시며 일기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고 잔다.



이런 저런 기록은 단독으로는 힘이 없으나

과정과 결과 모든 측면에서, 어느 기간 데이터가 쌓이면 큰 힘이 되었다.


나에 대해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인생을 흘러가는 대로 살기보다 조금 더 의지대로 선택하려는 방향성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자기 전에 진행되는 생각이 잠 자는 시간을 타고 의외의 해답을 안겨줄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것 저것 흥미를 갈아타며 꾸준히 하지 못하는 불치병에 걸린 것 같던 내가

최소한 일기는 꾸준히 썼다는

남들은 잘 모를 내 마음속에 핸디캡 하나를 치워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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