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린 Mar 16. 2019

문라이트; 자아, 사회적 약자, 그리고 방관자

영화 '문라이트'에 대한 분석


 학창시절 내내 주입식 교육을 듣다보면 과연 내게 필요한 걸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수동적 자세와 억압으로 자라난 아이는 20살이 되면서 얻게되는 자유에 낯섬을 느낀다. 그토록 갈망하고 찾아 헤메던 꿈은 성인이 됨과 동시에 환상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방황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깨달음이라 부른다.

 영화 문라이트는 유색인종과 성소수자라는 두 가지 상황에 놓인 약자를 비춰준다. 서브알턴(Subaltern)의 위치에 놓은 주인공을 보여줌으로써, 한 인간의 일생과 고뇌, 그리고 자아를 찾아떠나는 여정을 그려낸다.


 문라이트에서 주의깊게 보아야할 점은 [ 색, 소리, 카메라 연출 ] 이 세 가지 요소이다. 색은 자아를, 소리는 기억을, 그리고 카메라연출은 감정을 담는 중요한 상징으로써 작용한다.



1. 색에 관하여



-세 가지 색, 세 가지 자아


 샤이론의 삶은 세 가지 단계를 거쳐간다. 가정불화를 겪던 유년기,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청소년기, 자아를 상실한 성년기. 포스터의 세 가지 컬러는 샤일론의 자아를 상징하는 요소이다.


 파란색: 희망, 순수함,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 순수하기때문에 그만큼 행복했던, 샤이론이 그리워하는 시절을 상징한다. 샤이론이 행복했던 장소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파란색 조명, 파란색 인테리어, 파란색 물건과 옷이 등장한다.

 보라색: 동성애의 상징이자 예술가와 괴짜들처럼 일반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색이다. 성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사회에서 배제당하던 시절의 자아를 의미하며, 샤이론의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이 시기에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았고 사회가 규정짓는 '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검정색: 색(자아)을 상실한 무채색의 자아.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자아를 상실하고 혼란과 공허 속에 빠진 샤이론을 나타낸다. 무채색의 샤이론은 고통스런 과거와 마주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 엄마와 케빈을 마주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파랑(추억, 희망, 자아, 사랑)


"달빛 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후안의 대사에서 나타나듯, 문라이트에서 파란색이 중요한 키워드로 존재한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에 존재하는 파란색과 마지막 엔딩장면에 등장하는 푸르른 배경은 샤이론이 그토록 갈망하고 찾아 헤메던 자아를 나타낸다. 즉, 나이를 먹고 외모가 아무리 변해도 샤이론의 자아는 여전히 리틀(어린 샤이론)에 머물러 있으며,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 잊어버린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또한 샤이론의 행복한 기억 중 하나인 케빈(사랑)을 떠올리거나 관련된 장면에서 파란색 아이템(전구,티셔츠)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파란색은 희망을 의미한다. 과거의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은 샤이론의 심정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케빈은 샤이론이 자아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빨강(엄마, 분노, 두려움)

*붉은 조명은 성매매를, 엄마가 입은 붉은 티셔츠는 분노를 상징한다. 

 샤이론의 기억 속에서 엄마는 분노와 공포(빨강)의 존재로 자리잡는다. 흑인이자 여성, 그리고 미혼모. 샤이론의 엄마는 미국사회에서 가장 낭떠러지의 위치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가 홀로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성매매였다. 아들에게 스트레스와 분노를 풀던 그는 결국 피해자면서 가해자의 위치에 놓여지게 된다.  


2. 카메라 연출에 관하여

-세 가지 시점

 카메라연출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샤이론의 시점, 방관자인 우리, 샤이론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우리

 샤이론의 시점: 샤이론의 감정, 과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다. 흑인이자 동성애자, 미혼모의 자식인 샤이론이 사회로부터 배제당하고 따돌림 당하는 모습을 제 3자의 시점이 아닌, 1인칭 시점으로 표현한다. 과거에 대한 언급도, 심리에 관한 대사도 없으나 우리는 이 시점을 통해 샤이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방관자의 시점: 샤이론이 괴롭힘 당하고 쫓기고 어둠 속에서 홀로 웅크리는 동안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그저 바라만 본다. 사회로부터 쫓겨난 약자의 모습을 보았음에도 아무런 손길도 내어주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는 시점이다. '거봐, 너는 방관자야.' 라고 말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까지 느껴진다.

 샤이론과 마주하는 시점: 샤이론이 카메라를 바라보는 장면은 자아에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시청자에게 자신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음에 대한 고백을 나타낸다.  시청자는 샤이론의 상황과 변화를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샤이론의 시점일 때 우리가 도울 수 있었더라면, 방관자의 시점일 때 그에게 다가갔더라면, 그와 마주했을 때 그를 이끌었다면. 샤이론은 과연 그런 선택을 했을까?


-정체성

 샤이론의 성장시기별로 정체성을 의미하는 카메라 연출이 다르다.

 유년기: 따돌림, 소외, 방관자 시점의 카메라 연출. 굉장히 가깝거나, 굉장히 먼 거리

 청소년기: 흔들리고, 혼란스러우며 굉장히 인접한 거리. 클로즈업이 자주 사용됨

 청년기: 안정적이며 관찰하는듯한 연출. 인터뷰를 하는 듯한 거리감. 물흐르는 듯한 카메라 워킹


-인물표현

 인물에 대한 카메라 시점은 샤이론이 가지는 정체성 변화와 동시에 시야가 변했음을 드러내는 요소다. 특히 엄마와 후안에게서 큰 변화를 보인다.

1. 엄마

 유년시절의 샤이론에게 엄마는 고압적이고 두려운 존재로 비춰진다. 그에따라 카메라 앵글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점을 유지하며 샤이론이 겪는 중압감, 부담감을 표현한다. 샤이론과 엄마가 대화할 때, 둘은 같은 앵글에 잡히지 않는다. 이후 서로 화해하는 뉘앙스를 풍기며 포옹할 때 한 앵글에 잡힌다.

 후안과의 갈등을 겪던 엄마는 샤이론을 향해 분노를 퍼붓고 문을 닫는다. 서로 사이가 틀어지고 문을 닫음으로써 샤이론에게 관심을 끊었다라는걸 암시한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샤이론은 마약중독자인 엄마가 지긋지긋하고 혼란스러운 존재로 느낀다. 어릴적 느낀 중압감은 사라지고 나약하고 마약에 매달리는 엄마를 바라보며, 착잡함과 청소년기의 고독을 담아낸다.


2. 후안

 샤이론과 처음 만난 장면에서 후안은 창을 뒤로 한 채 역광으로 걸어온다. 흔히 말하는 후광이 비치는 효과로 등장한 셈이다. 이는 후안이 샤이론에게 구원자이자 희망이었음을 의미하며, 처음으로 샤이론에게 다가온 사람이자 살아갈 희망을 심어준 존재임을 나타낸다.

 후안 역시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앵글이지만 한 장면에서 독립적으로 나오던 엄마와는 달리, 샤이론의 옆에 붙어서 같은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이는 동반자이자 롤모델을 나타낸다. 후안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중압감이 아닌, 존경의 의미라 할 수 있다.

 후안이 마약상임이 밝혀지고, 샤이론은 엄마에게 마약을 팔았냐며 묻는다. 후안의 자세는 고해성사를 연상케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후안은 샤이론과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하며 여자친구의 위로를 받는다. 그 후 후안은 죽음을 맞이한다.

3. 케빈

 케빈은 유일하게 함께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함께 걷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샤이론이 가장 신뢰하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유일하며 평등했던 관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신체에서 약점에 해당하는 등을 너무나도 쉽게 관객에게 보여주며 수평적인 위치에서 나아가는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아도 그 상황만으로도 안정을 줄 수 있었음을 나타낸다. 자신의 모든걸 드러낸 유일한 사람이자 함께 기댈 수 있는, 어떠한 이해관계도 권위도 없는 평등한 관계인 셈이다. 샤이론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위로나 동정이 아닌, 케빈처럼 아무 말 없이 그저 곁에 머물러줄 수 있는 ‘나와 같은 자’였을 것이다.

 동시에 케빈이 등장하는 장면에선 클로즈업을 자주 사용한다. 샤이론의 감정을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로 생각된다. 이 장면에서 샤이론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고 케빈과의 미래를 암시하는 복선이 만들어진다.

 샤이론은 케빈과의 관계를 되돌리고 싶어하지만 케빈은 샤이론의 본명을 부르며 거리감을 둔다.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샤이론에게 도리어 넌 누구냐며 샤이론의 자아를 묻는다.화면은 어린아이의 그림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보여준다. 샤이론은 용기를 냈고 추억으로 돌아가고싶지만 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아이, 사회의 시선)이 있음을 나타낸다.

 샤이론의 자아가 여전히 과거에 묶여있었음을 나타내고, 케빈은 샤이론이 과거에서 벗어나 현실을 살아가야함을 의미한다.


-시각을 통한 간접적 언급

 문라이트에는 흑인이 겪는 차별이나 사회문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거나 고발되는 요소가 부재한다. 단지 끊임없이 샤이론을 비춰줌으로써 그가 처한 상황, 경제적 형편, 가정 내 불화, 주변인들의 문제를 비춰준다. 대사의 부재는 이것이 일상이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의미한다. 너무나도 익숙하기에 문제 삼을 수 없는, 그렇기에 심각한 것을 의미한다.


3. 소리에 관하여

 샤이론은 쫓기던 아이들에게서 도망쳐 숨는다. 히스테릭하게 울려퍼지는 문두드림이 그의 공포심을 극대화하며 무거운 침묵이 몰려온다. 이 장면을 통해 어렸을적 겪었던 공포일 수록 더더욱 깊은 트라우마로 박힌다는 걸 상징하며, 샤이론이 겪은 공포, 소외, 두려움을 음향으로 표현한다.

 샤이론을 향한 괴롭힘은 극에 달한다. 어렸을적보다 더 내성적으로 변한 샤이론은 도움을 주겠다는 타인을 거부하며 소통을 중단한다. 그는 귀를 틀어막고 구석에 숨고싶어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데, 타인의 모습이 점점 페이드아웃되면서 무음처리가 되고, 얼굴도 뿌옇게 변한다. 사회로부터 배제받음을 인정하고, 완전히 거부하며 마음의 문을 닫았음을 나타낸다. 이후 샤이론은 처음으로 저항하게 되고, 학교폭력 가해자로 몰린다.


4. 바다에 담긴 상징적 의미

 바다는 샤이론에게 있어 성장이자 정체성, 희망이자 자아를 의미한다.유년시절의 바다는 세상을 향한 첫 걸음이자 후안과의 유대관계를 나타내고, 청소년시절의 바다는 케빈과의 사랑과 정체성 각성을 보여주고, 성년기의 바다는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희망을 의미하며, 엔딩의 장면은 샤이론의 자아가 변화될 것이라는 의지를 나타낸다.


5. 엔딩에 대한 추론

 과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게 자아가 맞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내가 느낀 결론은 자아를 찾아가자는 게 아닌, 육체는 성장했으나 정신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갈피를 잡지못하는 어린아이 상태에 갇혀있다로 정리된다. 엔딩에 등장하는 어린 샤이론이 마치 자신은 자아에서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못했다라고 호소하는 것 같았고, 한편으론 과거의 두려움과 미련, 추억과 마주하고 현실을 직시한 샤이론이 이제부터 걸어간다는 의미로 느껴지기도 한다.


6. 결론

 샤이론은 저항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바꿔보고자, 자아를 확립하고자 기대했지만 사회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샤이론의 저항방법은 관객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흑인의 저항’을 표방한다.

 첫 번째로는 부모의 폭언과 억압에 대해 그저 아무 말 없이 반항적인 눈빛만을 보내는 나약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통해 대물림 되는 가정폭력의 현장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관객은 샤이론 역시 자신의 아픔을 또 다른 자식에게로 대물림 할 것이라 예상한다. 허나 감독은 샤이론에게 동성애라는 섹슈얼리티를 심어줌으로써 이러한 스테레오타입이 이어져선 안됨을 주장한다.

 두 번째로는 집단 따돌림에 시달리는 샤이론이 폭력을 통해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누군가나 어떤 기관을 통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닌 ‘흑인은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주장할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을 그대로 담아내었다. 그러나 그 전에 샤이론이 겪는 문제를 보여줌으로써 샤이론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폭력이었음을 암시한다. 결국 샤이론은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면 저항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었으며 그 선택에 따라 예정된 범죄자의 삶을 사는 것으로써 반복되는 흑인들의 문제와 사회진출에 대해 논하고 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드러냈다. 마약에 중독된 미혼모의 아이이자 흑인 동성애자. 미국사회의 가장 끄트머리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샤이론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흑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과연 이러한 사고는 당연한 것인가? 감독은 샤이론이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가진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인지시켜주고자 하였다. 나는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샤이론이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해 헤매고 과거를 마주하였던 것처럼, 우리 역시 과거의 기억을 거스르며 끊임없이 자신의 과오와 마주하여야 한다.


#문라이트

매거진의 이전글 캡틴마블; 여성에겐 롤모델이 필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