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린 Nov 06. 2022

에에올; 어떤 선택을 해도 나는 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해석


내 평점 ★★★★★



 수 많은 선택지 앞에 섰을 때, 또는 이미 선택을 해버린 상황에서도 마음속 불확신이 가시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선택이 맞는 건지, 내가 한 선택을 스스로가 믿을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되면 꼭 이렇게 후회한다.


어떻게 돌아가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은 불확실함 속에서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나를 비춰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선택은 결국 내 가슴이 원하던 것이고, 과거로 돌아가 다른 운명의 갈림길로 향할지라도 결국은 현재의 선택이 꼬리표처럼 나를 따라다닐 것임을 말해준다.




 에에올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여러 갈래의 선택지가 있고, 어느 것을 고르느냐에 따라 나아갈 길 또한 변하지만 무엇을 선택하던 '나'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1. 언어장벽을 이용한 천재적 연출


 에에올을 보면서 떠올렸던 작품은 '조이 럭 클럽'과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이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중국계 미국인 여성작가의 작품이며, 이민자 어머니와 1.5세대 또는 2세대로 태어난 딸의 서사가 중심이다.

 이민자 문학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소재는 가족 내부에서 벌어지는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문화적 전통성의 충돌이다. 이전부터 주목받아 온 중국, 일본계 작품은 물론이고 최근 들어 관심이 쏟아지고 있는 한국계 작품 또한 이런 소재를 자주 다루고, 서사의 중심에 있다.

 에에올 또한 이민자 가족 내부에서 벌어지는 세대 간의 갈등, 문화적 전통성의 충돌이 이야기의 주 흐름이다. '멀티버스'는 영화의 주요 소재에 불과하다. 이야기의 중심축은 주인공인 에블린이 겪는 이민자로서의 문제와 어머니가 가진 전통적 관념과 딸이 가진 새로운 관념이 서로 충돌하고 갈등을 빚는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이민자 가정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문화적, 세대적 충돌도 있지만 그에 앞서 언어적 장벽이 소통을 방해하는 원인이 된다. 모부세대는 새로운 국가의 언어를 능숙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에 따라 당연히 문화적 차이 또한 쉬이 수용하지 못한다. 반면 자식 세대는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수용하고, 구세대의 것을 거부한다.


 에에올은 이 언어적 장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다만 이 사용은 딸과 엄마의 대화가 아닌, 남편과 아내의 대화 속에서 연출된다.

 딸과 대화할 때에는 최대한 영어로 대화하고, 타인(베키)이 들어서는 안되는 가족 간의 대화를 할 때에만 광둥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남편과 대화할 때는 광둥어와 영어를 혼재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통상적인 이민자 문학에서 자식과 모부 간의 대화를 연출할 때 쓰는 소통 방법인데, 에에올은 서로 이민자로서의 언어적 문제를 공유해야 할 부부가 언어적 장벽을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편이 영어로 질문을 하면 아내는 광둥어로 대답하고, 반대로 아내가 영어로 말하면 남편은 광둥어로 대답한다. 서로 같은 언어로 질답을 주고받지 않는다.

 이 언어적 연출은 부부가 함께 대화하면서도 같은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두 사람이 다른 언어를 통해 대화하는 장면은 동상이몽의 현장이다.


 이 연출이 화룡점정에 이르는 장면은 이혼 서류를 두고 서로 반대쪽 페이지를 보며 광둥어와 영어를 섞어 대화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서로와 대화하고 있지만 둘 사이에 오가는 언어가 다르며, 주제 또한 다르다.

 통일되지 않은 대화는 결국 소통의 단절로 이어진다. 다른 언어와 다른 주제로 소통하는 대화는 결말이 없기 마련이고, 각자의 주장만을 내세우다 끝날 뿐이다.

 그러다 알파 유니버스와 접촉하게 된 이후로 남편과 아내는 같은 언어, 같은 주제로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남편과 딸이 그토록 외치던 "대화 좀 해"라는 말이 드디어 통하는 순간이다.

 알파 웨이먼드와 대화하는 에블린은 서로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지만 다시 원래의 웨이먼드로 돌아오면 광둥어와 영어를 섞어 대화한다. 그러다 원래 웨이먼드와 같은 언어, 같은 주제로 소통하는 순간이 오는데, 바로 웨이먼드가 보여준 서류가 이혼서류임을 알게 되면서 "이혼이 쉬워 보이냐"라며 분통을 토해낼 때 웨이먼드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집중한다.


2. 멀티버스 속의 소통


 여기서 재밌는 생각이 드는 게, 에블린은 누군가의 소통을 하는 과정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디어드리와 세무 관련 대화를 할 때에도 혼자 망상에 빠지거나, 알파 웨이먼드에게 이끌려 대화가 중단되고 웨이먼드나 딸과 대화할 때에도 멀티 버스 속 자신에게 끌려다닌다.

 그렇다면 작품에서 말하는 진정한 소통은 무엇인가. 나는 이 점에서 [같은 언어/같은 주제/같은 유니버스]라는 삼위일체가 이루어져야 상호 간의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알파 웨이먼드와의 대화가 분명 혼란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그럼에도 빠르게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언어/같은 주제/같은 알파 유니버스]를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반면 웨이먼드와의 대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단된 것은 [다른 언어/다른 주제/다른 유니버스]를 얘기하고자 했기에 짜증으로 대화를 끊고, 다른 주제로 환기시키려는 행동이 반복된다.


 그러나 언어적 장벽 만으로는 딸과 엄마와의 관계를 해석할 수 없다. 여기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딸과는 같은 언어로 대화하는데 왜 주제가 통일되지 않느냐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조이와 에블린이 같은 언어를 씀에도 소통할 수 없는 것은 남편과의 소통과 다른 고차원적인 문제, '세대'가 존재하며, 에블린이 조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받아들이고자 한 적이 없다는 심각한 문제가 존재한다.


 웨이먼드와 에블린 간의 문제는 같은 주제를 말하지 않는다는 단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 외의 문제들의 경우 서로 동일하게 겪고 있으며 상호 간에 반복적으로 오가지만 못 하는 것이다.

 웨이먼드와 에블린은 같은 세대, 같은 언어들, 같은 주제들을 공유한다. 다만 이것을 취사선택하는 '순간'이 다를 뿐이다. 둘은 모국어인 광둥어와 어설픈 영어를 사용한다는 같은 언어적 경험을 공유하고, 에블린의 인생사에서 엿볼 수 있듯 같은 세대를 공유하며, 고향인 홍콩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여 삶에 찌드는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

 적어도 두 사람은 '지금 당장은 다른 주제를 말하느라 소통이 안될지언정' 결국에는 서로가 선택할 수 있는 대화의 범위가 동일하기 때문에 이를 끊임없이 고르다 보면 일맥상통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반면 딸인 조이는 미국에서 태어나 모부 세대와 다른 경험 속에서 성장한다. 태어나자마자 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던 에블린과는 달리, 미국이라는 공간과 왕부부의 가정 분위기에서는 딸이 더 이상 흠이 되지도 않고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일 뿐이다. 에블린과 조이는 탄생 시점부터가 다른 경험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시작한다.

 에블린은 강압적인 아버지 아래서 성장해 딱 한 번 아버지에게 저항한다. 그리고 그 저항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반면 조이는 여러 번 엄마에게 저항하고 갈등을 빚는다. 그러나 그 저항은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서로를 찾고 도망치는 엄마와 딸의 관계가 된다. 현실의 에블린은 도망치는 조이를 찾아내고, 멀티 유니버스 속의 조이는 도망치는 에블린을 찾아낸다.


 언어의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소통되지 않던 두 사람은 같은 유니버스를 통해 소통하기 시작한다. 언어가 필요 없는 '돌 유니버스'에 들어서게 되자 드디어 두 사람은 갈등도, 싸움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소통을 한다.

 이 유니버스에 들어서면서 왕 가족이 고수하고 있던 규칙이 깨진다. 바로 '윗세대가 규칙을 만들고 아래 세대가 그것을 따르는 것'. 그동안 왕, 콴 가족은 윗세대가 만든 규칙을 아래 세대가 따르느냐 거부 하느냐로 명령 구조가 흘러갔다. 공공은 에블린에게 뛰지 마라, 결혼하지 마라라고 규칙을 제시하고 에블린은 조이에게 문신하지 마라, 대학을 왜 관둔 것이냐, 할아버지가 충격받지 않게 동성 연인을 감추라고 규칙을 제시해왔다.


 하지만 돌 유니버스에서는 조이가 에블린에게 그저 돌이 되자는 규칙을 제시하고 에블린은 그 규칙을 거부하며 조이에게 다가간다. 원래 유니버스라면 조이의 말이 예의 바르지 못하다고 지적하며 에블린이 만든 규칙을 강요했을 터인데, 돌 유니버스에서는 에블린이 자신의 규칙을 제시하지 않는다.

 에블린과 조이는 현실 세계에서 에블린이 조이를 쫓는 관계, 멀티 유니버스에서 조이가 에블린을 쫓는 관계였으나 돌 유니버스에서야 비로소 다시금 에블린이 조이를 쫓는 관계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 관계로 들어서면서 에블린은 그동안 조이와 같은 주제로 대화하는 것을 거부해오던 것을 버리고 조이에게 다가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듣길 원한다.


3. 염세주의의 함정에 빠진 조이


 조이는 두 개의 캐릭터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에블린의 과거와 같이 엄마의 말에 충실히 따르다 딱 한 번 뜻을 거스르는 것,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엄마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

 두 캐릭터 모두 에블린에 의해 만들어진다. 에블린의 성정을 닮아 엄마가 시키는 대로 버스 점프 훈련을 따르지만 그 끝은 비극이었고, 모든 유니버스 속에 존재하게 되자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되고 엄마와 끊임없이 갈등을 겪게 된다.

 조이는 진리를 찾고자 '베이글' 위에 그동안 자신이 겪어온 좌절, 포기, 절망의 모든 감정을 쏟아내지만 그렇게 쌓아올린 베이글은 조이를 끝없는 우울함에 빠지게 할 뿐이다. 결국 조이는 모든 것은 무의미하며, 더 이상 엄마와의 관계 개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 무로 돌아가고자 하는 선택을 다짐한다.


 조이 캐릭터는 동시대의 청년층들이 자주 겪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모부세대와 겪는 관점의 차이, 세대 차이에서 오는 갈등, 성장과정에서 겪는 박탈감, 인정받지 못하는 자아. 이 과정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끊임없이 죽이고 포기하면서 허무함과 염세주의에 빠져든다.


그냥 돌이나 되자, 여기선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수많은 유니버스를 보고 온 조이는 이렇게 결론을 낸다. 엄마와의 관계를 개선할 자신은 없고, 더 이상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조이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는 세계를 꿈꾼다.

 그럼에도 조이는 끊임없이 유니버스 속에서 엄마를 찾아낸다.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아이가 엄마를 찾듯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정의 내린다. 나와 같은 것을 볼 수 있고, 내가 느끼는 것을 보는 사람. 그것이 바로 엄마라는 것.


 조이와 에블린의 관계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 자주 사용되는 서사적 연출인 부자간의 권력투쟁과 닮아있다. 아버지를 죽여야 비로소 아들은 성장할 수 있고, 그 자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이들 사이에서는 소통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방어하고 공격하는 대립구도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조이와 에블린은 다르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본 것, 내가 느낀 것을 나의 어머니도 경험하지 않았을까. 내 마음속에 있는 이 혼란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와 가장 닮은 어머니 만이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조이는 해답을 찾기 위해 에블린을 찾아다닌다.

 파트 1의 끝에서 에블린이 기절하자 조이는 다음에 또 만나자며 자리를 떠난다. 애초부터 에블린이 가진 어머니로서의 지위, 권력은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는 듯 어떤 아쉬움도 없이 남처럼 군다.


4. 금기를 깨뜨리는 딸


 조이는 작품 내내 가족들에게 있어 금기 그 자체로 등장한다. 대학을 자퇴하고, 엄마와 갈등을 겪고, 동성 애인을 사귀고. 조부 투파키로 밝혀진 이후에는 이것이 극에 달한다.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한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다. 사람을 죽이고, 욕설을 쉽게 내뱉고, 성인 용품으로 남을 후려치면서 엄마를 당황케 한다.

 조이가 보여주는 행동들은 모부세대들이 자식들에게 권유하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형형색색의 탈색 머리, 괴상한 옷, 술 담배, 문신, 그리고 부끄럼 없이 자기 자아를 드러내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모부세대가 권유하는 말을 밀려 자식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조이는 위와 같은 내용들로 엄마와 갈등을 겪는다. 엄마가 이를 막아서면 더한 반항을 하며 거세게 저항한다.

 조이 캐릭터는 동양인 모부가 자식을 보는 관점을 유쾌하게 담아낸 것 같다. 나랑 똑 닮고 절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귀한 존재. 동시에 누구보다 이해되지 않고 두려운 존재. 그야말로 사탄과 동고동락하는 아찔한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낸듯하다.


 아주 예전에 해외여행에서 만났던 한국계 부부가 한 말이 생각난다. "이 나라에는 마약도 흔하고 동성애자들도 있어서 우리 아이가 물들까 봐 걱정된다."라는 황당한 말을 하셨는데, 그 걱정이 떠오른다. 조이는 그 부부의 걱정거리 그 자체인 캐릭터니까. 이런 아이를 마주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궁금증도 함께.

 조이의 행동이 보수적인, 특히나 동양계 모부들이 흔하게 하는 자식에 대한 걱정과 고정관념이 모두 담겨 있어서 더 좋았다. 뚱뚱하고, 동성애자에 대학은 자퇴하고, 뜻이 어쨌든 간에 함부로 문신을 한 나쁜 딸. 모든 동양인 부부들의 걱정 그 자체가 혼합된 듯 등장한 캐릭터인 탓에 동양계 이민자 가정 내의 문제를 낱낱이 드러내는 것 같았다.


5. 맥거핀인 듯 맥거핀 아닌 베이글


 베이글은 맥거핀에 불과하다지만, 그렇기엔 너무나도 많은 곳에 존재한다.

 영화 시작에 조이가 응시하던 블랙홀 마냥 어둡디 어두운 세탁기 내부, 에블린의 일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디어드리의 마커 펜 표시. '베이글'은 맥거핀이지만, 베이글의 형태를 띠는 것들은 저마다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형태는 다르지만 검은 원이 가지는 의미는 '이것이 문제이고, 이것만 없애면 해결할 수 있다'라는 상징이다. 세탁기는 가게 손님들이 가져온 빨랫감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고, 디어드리의 마커 펜은 '가라오케 기계를 비용처리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식이다.


 조이의 베이글은 자신 마음속에 있던 모든 가능성을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무'의 공간이다. 조이는 그 속에 자신을 던져 존재 자체를 지움으로써 자신이 해결할 수 없다고 여기던 문제들, 특히 에블린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면서 조이는 끊임 없이 에블린에게 자신과 함께 사라지자며 베이글 속으로 들어갈 것을 권유한다. 아무 것도 의미가 없으며 고개만 돌리면 외면 할 수 있다며 어머니가 겪은 실패와 좌절, 수 없이 단념되어 온 과거를 사라지게 하자고 말한다.

 조이가 가진 혼란은 에블린 또한 겪은 것이다. 조이가 겪은 과거의 불안, 좌절들은 에블린 또한 수 없이 많은 꿈과 가능성을 포기하며 겪던 것과 동일하다. 베이글과 세탁기는 동일하다. 조이는 단념된 가능성을 베이글 위에 올렸고, 에블린은 손님들이 가져온 빨랫감을 세탁기 안으로 집어 넣어 그저 지나간 것, 이제는 무의미한 것으로 바꾼다.


 하지만 이를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는 다르다. 조이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고, 에블린은 세탁기 속의 문젯거리(빨래가 아닌 것)를 발견해 밖으로 끄집어 낸다.

 이는 영화 후반에 들어서서 다시금 등장한다. 조이는 자신 안의 염세주의를 이겨내지 못 하고 결국 베이글에 몸을 던지지만, 에블린은 평생의 문젯거리였던 딸을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려고 한다.


6. 말로는 소통할 수 없는 것들


 에에올의 가장 큰 특색은 '말이 안 되는 행동을 해서 버스 점프를 하는 것'이다. 헌데 이 점은 에에올의 이야기 흐름과 정반대로 상충한다.

 위에서 나는 에블린이 가족들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 하는 것이 다른 언어, 다른 유니버스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정작 다른 유니버스의 에블린과 연결되는 것은 같은 언어, 같은 유니버스를 활용한 것이 아닌, 말이 안되는 황당한 행동을 통해서 싱크가 이루어진다.

 이는 그동안 에블린이 가족들과 진실된 소통을 해오지 못 했음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로 본다. 가족과 같은 주제로 연결되기 위해서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시간에 존재하려고 하지만 대화는 늘 단절되고 갈등으로 이어진 것과 다르게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할 수록 다른 유니버스의 '나'와 쉽게 연결될 수 있다.


 다른 유니버스의 '나'는 다른 경혐과 상황을 가진 또 다른 '나'다. 나는 나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나'. 이를 멀티버스라는 세계관을 지우고 본다면 어떻게 될까? 나와 다른 경험과 상황을 가졌기 때문에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나와 가장 닮은 사람. 바로 조이와 에블린을 뜻한다.

 에블린에게 있어 조이는 자신과 닮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어여쁜 딸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과 다르게 모부에게 저항하고 엇나가기도 한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러했듯, 화도 내고 타일러도 본다. 하지만 여기서 변화가 생긴다. 공공은 에블린을 이기지 못 하고 놓아주지만, 에블린은 끝까지 조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는다. 딸이 쓰는 언어로 소통해도 서로 고성이 오갈 뿐이고, 각자 '내 상황'을 이해해달라며 소리지를 뿐이다. 그러고 나서 조이는 늘 도망가고, 에블린은 진심으로 하고자 했던 말을 단념한 채 쓴소리를 하는 것으로 반복된다.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가라오케 기계로 노래를 부르는 세사람을 거울로 보여주는데, 여기서 에블린이 조이를 대해온 행동이 보여진다. 조이는 가족의 중심에 서 있고 부부가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지만, 조이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자기 의지를 표출하면) 에블린이 조이의 입을 틀어막아 그것을 저지한다. 이 과정이 성장 내내 반복되면서 조이와 에블린은 말로는 소통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이후 두 사람이 진정으로 소통하는 순간은 딸을 주먹으로 때리는 과정에서 수 많은 멀티버스를 거치고 나서야 이루어진다. 평소였다면 하지 않을 행동을 하자 진정으로 딸과 연결되고 함께 돌 유니버스로 날아간다.


 남편인 웨이먼드와의 소통도 버스점프를 계기로 이루어진다. 그전까지는 똑같은 종이 하나를 두고도 다른 언어, 다른 맥락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웨이먼드가 기괴한 행동을 벌여 버스 점프를 한 뒤로 에블린도 그에게 집중하며 같은 언어, 같은 맥락으로 대화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

 조금 재밌는 점은 이 과정에서 웨이먼드는 철저히 에블린의 각성을 위해 사용된다는 점이다. 에블린이 멀티버스의 전사로 각성하고, 조이의 진실을 알게 되고, 과도할 정도로 멀티 버스를 하도록 해금하는 것에 있어 알파 웨이먼드가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그는 죽고 에블린은 각성한다.

 서양 작품의 전형적 히어로 플롯은 남성 주인공이 연인의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각성하는 구조로 흘러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냉장고 속의 여자와 같은 용어들이 이런 전형적 히어로 플롯을 꼬집기 위해 등장했다. 이 작품도 원래는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만들어지다 여성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들었는데,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아무튼, 조이는 나와 같은 자인 에블린을 끊임없이 찾아다니지만 아빠인 웨이먼드는 자신을 방해하는 걸 발견하자마자 죽여버린다. 조이에게 필요한 건 자상하고 상냥한 아빠가 아닌, 나와 똑같은 존재이자 앞으로 나를 이해해야만 하는 엄마뿐이다.


7. 모든 것, 모든 곳이 한 번에 귀결되는 순간


 처음으로 버스점프를 한 에블린은 연예인으로서 성공한 자신을 보며 웨이먼드와 결혼한 것을 후회한다. 그리고 여러 번의 버스점프를 시도하다 혼란에 빠진 에블린은 웨이먼드를 유리조각으로 찌르기까지 이른다.

 에블린의 운명은 어떤 유니버스일지라도 늘 웨이먼드를 상처입힌다. 그것은 말이 될 수도, 상황이 될 수도, 물리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웨이먼드는 에블린을 포기하지 않는다. 알파 웨이먼드는 당신은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사업가로 성공한 웨이먼드는 당신이 날 상처줄 지라도 다른 생애에서는 당신과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살고 싶다며 진심을 전한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나서 돌아온 현실에서는 내가 살아온 방법은 다정하고 상냥하게 구는 것이라며 에블린을 구제하고자 타인에게 호소한다.


 에블린은 그동안 나쁘게 보아온 웨이먼드의 행동에 담긴 뜻을 받아들인다. 그 후 펼쳐지는 멀티 유니버스에서 에블린은 자신이 살아온, 살아올 수도 있었던 모든 인생들이 서로의 득실이 존재하는 복합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성공한 줄 알았던 연예인의 삶은 웨이먼드와 조이를 놓친 인생이었고, 누구보다 먼저 다른 유니버스와 접촉한 알파 에블린은 딸을 정신적으로 몰아세우다 세계를 파괴에 이르게 한 인생이라는 것.


 멀티버스는 선택지다. 에블린이 지닌 수많은 가능성은 에블린이 점프할 수 있는 수 많은 경로가 되고, 무엇을 선택하든 에블린에게 있어 다른 걸 선택했다면 더 행복했을 지도 모른다는 불만족을 심어준다. 웨이먼드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에블린에게 인생의 사소한 결정으로 차이가 생기고, 그로 인해 수 많은 멀티 버스 속 에블린이 존재함을 말해주고 세상을 원래대로 돌려 놓아야 한다고 알려준다.

 에블린이 선택한 것은 내가 나를 인정하는 것. 아버지가 자신을 막아섰더라도, 웨이먼드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 모든 선택은 결국 자신이 스스로 한 것임을 인정한다. 이를 통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어떤 유니버스에 존재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에블린은 베이글과 정반대의 모양을 지닌 장난감 눈을 이마에 붙이며 과거의 선택을 통해 이르게 된 현재의 나를 직시한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 자신의 가슴이 따르는 대로 행동한다. 내 안의 혼란을 잠재우고 비로소 조이가 바라던 해답을 알려주기 위해 아버지와는 정 반대로 조이에게 뛰어간다. 조이는 허무함에 빠져 모든 것을 외면하기 위해 베이글로 몸을 던진다.

 조이와의 몇 번의 사투 끝에 에블린이 조이를 붙잡는 것도 잠시, 에블린은 조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놓아줌으로써 조이가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한다. 집 안에 걸려있던 아버지와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자신을 미워하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사실은 자식을 사랑해 그 선택을 존중해 준 것처럼, 조이 또한 스스로 답을 선택해 자신의 세계를 확립할 수 있도록 믿음을 내어주는 것으로 사건이 종결된다.



8. 마치며


 B급 영화를 좋아하는 취향과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를 좋아하는 탓에 너무나도 잘 맞았던 영화다. 하지만 호불호가 강한 만큼 남에게 쉽게 추천해 주기는 어려울 거 같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장녀다, 엄마랑 세대갈등을 심하게 겪고 있다 하는 사람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영화. B급 무비에 히어로물과 CJ 감성을 한 스푼씩 넣은 유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보니 2회차를 찍게 된 영화인데, 두 번째 볼 때 비로소 영화 속에 숨은 요소들이 눈에 잘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디어드리와의 관계에서 깔리는 테마곡이나 베이글과 비슷한 문제적 요소들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3회차도 곧 찍을 생각.


#에브리씽에브리웨어올앳원스

                    

매거진의 이전글 랑종;껍데기는 누구의 정의 하에 세워지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