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브스턴스' 해석
내 평점 ★★★★★
다사다난한 한 해였고, 영화 또한 예술성이 돋보이는 명작들이 여러 등장한 해였다.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한다면 단연 ‘존 오브 인터레스트’일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또 하나의 명작이 등장했는데, 바로 데미 무어의 주연작 [서브스턴스]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유대인에게서 나오는 이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가해자의 시선이라면
서브스턴스는 여성에게서 착취할 수 있는 이권, 더 젊고 아름답고 성적 대상화가 가능한 상품을 전시하려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의 시선을 그려낸다.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다르고, 소재 또한 다르지만 착취라는 요소로 본다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현대판, 여성판이 바로 서브스턴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푸어 띵스를 보고 실망한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만족스러울 것이다.
아직 영화를 한 번밖에 보지 못했고, 또 영화 안에 수많은 오마주가 가득해서
몇 번 더 보고 내용을 보강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그럼에도 미숙한 생각이나마 기록하고 싶어 글을 쓴다.
1. 여성의 자해는 상품이다.
영화 <서브스턴스>의 주제가 노화, 루키즘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있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노화, 루키즘은 그저 발단에 불과할 뿐이고, 진짜 주제는 ‘여성의 자해는 어떻게 상품화되는가’라고 생각한다.
작품 내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요소들이 바로 자해와 폭력인데, 엘리자베스와 수 모두 두 가지 양상을 고루 보여주면서 그 방법이 다르다.
엘리자베스는 주로 자해에 치중되어 있으며, 수를 향한 폭력 또한 결국엔 자신의 육체를 훼손하거나 폭식을 하는 행위이기에 실질적으로 수의 신체에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기껏해야 수가 악몽을 꾸거나 엘리자베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자해적 행위는 자존감의 근원, 미와 명성이 추락했음에서 기원한다.
작품 내내 엘리자베스는 시선을 회피하고 고개를 숙인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행동 또한 긴장과 두려움, 피해의식에 시달리며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모습은 샤워 장면에서 자세히 나타나는데,
엘리자베스는 샤워 장면 내내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나중에는 아예 샤워실 바닥에 누워 머리를 박는 행동까지 하게 된다.
반면 수는 엘리자베스와 대조되게 폭력에 치중되어 있으며, 샤워 장면 또한 고개를 치켜들고 스스로의 신체를 탐미하는 행동을 보여준다.
또한 폭식, 자해 등의 행동으로 스스로의 몸에 폭력을 가하는 엘리자베스와 달리,
수는 직접적으로 또 다른 육체에게 폭행을 가하고 그의 시간을 뺏는다.
이후에 모체와 숙주가 분리되고 분노를 이기지 못한 수는 엘리자베스에게 달려드는데, 모체의 파괴는 숙주의 파멸로 이어진다는 것을 망각해버린다.
결국 수는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지만 이 행동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더 큰 의미에서의 자해가 된다.
2. 서브스턴스
작품 속 약물 ‘서브스턴스’는 그 정체나 성분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사실상 맥거핀에 가깝다.
회사도, 성분도 알 수 없으며 설명서마저도 성의 없는, 게다가 압생트를 떠올리는 초록색이다.
초록색은 오래전부터 서양에서 독, 죽음, 악을 상징하는 색이며
압생트 또한 환각성분으로 인해 여러 문제를 일으키다 결국 판매 중단 되었단 걸 생각해 보면
엘리자베스의 비극은 이미 예정된 것이며, 그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알 수 있다.
감독 코랄리 파르자는 인터뷰를 통해 이 약물의 정체를 밝혔는데
위고비, 오젬픽으로 대표되는 약물의 오남용, 더 나아가 성분을 알 수 없는 여러 다이어트 약품이라고 말한다.
(https://www.vogue.co.uk/article/coralie-fargeat-interview-the-substance)
한국에서도 최근 몇 년간 다이어트 약물 오남용으로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고, 얼마 전에는 오젬픽이 국내에 출시한다는 뉴스가 크게 화제 되었다.
다만 이러한 약물들이 원래는 우울증, 당뇨 등의 치료제였으며, 약물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선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 서브스턴스를 기꺼이 사용하는 엘리자베스처럼 말이다.
재밌게도 약물의 이름, 서브스턴스(Substance)는 (화학) 물질이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실체라는 뜻도 가진다.
엘리자베스의 몸을 가르고 수가 태어나고, 수의 몸을 가르고 괴물이 태어나지만 이 세 존재의 욕망은 동일하다.
사랑을 갈구하고, 주목받길 바라며, 자신을 전시하길 원한다.
엘리자베스는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한 채 수가 자신을 망가뜨림을 알면서도 그를 죽이려던 행동을 멈추고 여전히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으려고 하고
수는 자신을 대상화하고 역할을 요구하는 사회에 기꺼이 응답한다.
마지막으로 태어난 괴물 또한 어떻게든 무대 위로 올라가고자 한다.
분리된 육체, 모체를 가르고 태어나는 행위로 인해 세 존재는 별개의 것처럼 느껴지지만
‘당신은 하나다’라는 목소리처럼 외형이 달라진다고 해도 그들 마음속 욕망의 본질은 하나다.
3. 조각난 채로 전시되는 여성
작품 내내 여성의 신체는 마치 고깃덩어리처럼 부위별, 프레임 단위로 평가받는다.
엘리자베스는 상처 난 등과 늙고 초라해진 신체의 결점을 전체적임 프레임으로 잡고
수의 경우 입술부터 시작해 신체 곳곳을 세부적으로 분해한다.
수는 등장부터 자신의 신체를 탐미하는 등 철저히 대상화된 신체로 등장하는데,
이는 엘리자베스 폭식 후 악몽을 꾸며 깨어나는 수의 모습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전날 밤 갖은 음식으로 폭식을 한 엘리자베스의 영향으로
수의 신체에 변형이 생기고 몸속에서 닭고기를 꺼내는 기괴한 행동하는 장면으로 두 사람의 스위치가 이루어지는데,
이때 수의 이상한 점을 체크하고자 온 직원들이 화면으로 달라붙어 1프레임 단위로 그녀의 신체를 감상한다.
이 장면이 소위 말하는 ‘카메라 마사지’를 비꼰 장면으로 느껴졌다.
카메라 마사지는 연예인들이 데뷔 이후 카메라에 잡힌 자신의 얼굴을 계속 체크하면서 결점이나 단점을 조금씩 고쳐나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결국 자신의 외모적 특성을 결점으로 왜곡하고 ‘더 나은 나’에 집착하는 결과를 낳는다.
연예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중안부, 스트레이트/웨이브 체형, 얼굴 세로 길이 등의 유행에 시달리며 ‘더 나은 나’를 꿈꾸며 자신의 신체를 1mm 단위로 분해하고 개선하고자 시도한다.
서브스턴스의 메세지 ‘더 나은 나를 꿈꿔본 적 있는가?’라는 메세지는 단순히 영화적 요소가 아니라 현실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서브스턴스 속 여성은 ‘더 나은 나’를 위해 알 수 없는 약물을 주입하고 새로운 신체를 얻게 되지만
현실 속 여성은 식욕억제제와 성형, 1mm 단위의 외모 품평으로 ‘더 나은 나’로 스스로를 개조한다.
4. 식욕은 죄악이다
작품 속 음식과 식사 장면은 역겹고 부담스럽게 연출되는데, 유일하게 아름답게 잡히는 수가 다이어트 콜라를 마시는 장면뿐이다.
재밌게도 이 장면이 수가 음식을 먹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다.(내 기억에 의한 거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엘리자베스는 수에 대한 분노를 폭식으로 해결하는 데, 감독이 위고비로 비롯되는 다이어트 약물을 비판한 점을 고려했을 때,
여성에게 있어 음식이 단순히 먹는 것을 넘어서서 자해 수단이자 죄책감인, 현대 사회의 기묘한 풍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5. 본질
작품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점은 엘리자베스와 수는 기억을 공유하는가? 와 둘은 같은 존재인가 다른 존재인가에 대한 문제다.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기억: 둘은 기억을 공유하나, 7일간의 기억이 꿈의 형태로 압축되어 전달된다. (=악몽)
-존재: 둘은 같은 존재이며, 분할하려는 시도가 지속적으로 좌절되는 존재다.
수와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 판매자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존재의 잘못으로 자신이 피해를 입고 있음을 호소한다.
수는 한술 더 떠 “The balance is not working”이라며 고함을 지른다.
하지만 겉모습과 행동만 다를 뿐, 두 사람의 성격과 행동은 일치하는데
서로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나의 혐오스러운 면을 내 잘못이 아니라 ‘그것’ 때문이라고 탓하는 점이다.
게다가 둘 모두 현재의 상황에서 도망치고자 기꺼이 서브스턴스를 사용한다.
다만 노화와 실패로 인해 큰 상처를 겪은 엘리자베스는 부탁하는 태도와 긴장된 모습으로 행동하는 것이고
수는 자신의 외모에서 나오는 권력(물론 그것은 허상이다)을 믿고 상대에게 고함과 분노를 쏟아낸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듯,
겉모습은 엘리자베스, 수의 모습으로 계속 바뀌고 가릴지언정
내면은 여전히 욕망과 증오, 분노, 자기혐오가 해소되지 않은 파괴된 존재(One)다.
그래서 두 주인공 모두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고 결말 또한 파멸로 향한다
이후 등장하는 엘리자수가 지금의 나보다 나은, 그러니까 작품 초반에 등장한 ‘더 나은 나를 꿈꿔본 적 있는가?’라는 말처럼
엘리자수의 얼굴보다 더 나은 엘리자베스의 얼굴로 가면을 만들어 자신을 가린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외모를 혐오하며 얼굴을 쥐어뜯고 자해를 했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6. 결론
지나친 여성 성적 대상화라는 이유로 관람을 거부하기엔 너무나도 잘 만들었고, 잘 짜여진 한 편의 건축물과 같은 예술영화다.
성적 대상화도 결국은 여성을 조각내어 비판하는 현대 사회를 풍자하는 것이기에 어느 정도 감수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작품에 대한 어떤 평가가 따르던 간에, 관객의 태도, 영화에 대한 비난과 평가 모두 작품의 한 요소이지 않을까.
또한 이 영화를 보면서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이라는 책과 일본 만화 '카사네'가 생각났는데,
두 작품 모두 결국 본질은 변하지 않고, 여성의 외모나 더 나은 나에 대한 강박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같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서브스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