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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Feb 08. 2023

생일 선물은 시간으로 받을게

내가 원한 온전한 하루

올해 받고 싶은 선물을 묻길래 '통으로 쓰는 24시간'이라고 했다.

가족을 이룬 후로 내 시간은 공공재 같은 것이 되어서 몇 시간을 통으로 내가 원하는 것에만 집중한다는 것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사치 중의 사치가 되었다. 그것을 선물로 받아서 생일주인 이번 주말을 사치x사치스럽게 지내보았다. 아무도 날 부르지 않음에 황홀해하면서 노트북 화면과 활자로만 하루를 꽉 채웠더니 아주 행복했다. 남편은 조용히 없는 사람처럼 내가 잘 곳, 먹을 곳에 알아서 데려다 주고 좋은 술로 나의 숙면을 도와주었다. 이런 외조도 내가 누릴 시간 선물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생일에 뭐했냐고 친구가 물어서 자랑스럽게 워케이션을 즐겼다고 하니 생일엨ㅋ일요일엨ㅋㅋ이런 반응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진짜 웃긴 것 같아서 나도 웃었다. 아마 과거의 나는 24시간 일만 하는 하루가 소원이 된 미래의 내가 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테다. 응 모르는 게 약이다. 내가 이번에 선물로 받은 하루는 과거 언젠가의 나에겐 지긋지긋하거나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하루였다. 이건 완전.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엄마가 세탁해주는 옷을 입으며 출근하고 일하고 야근하고 월급 받으면 대출금도 갚지만 꼭 새 옷을 사던 어느 시절의 어느 주말. 역시 엄마의 수발을 받으면서 종일 일을 하던 그런 주말과 아주 흡사하지 않은가.


그때가 좋을때다 류의 말이 울림을 주는 유일한 경우는, 그 말을 하는 게 자기 자신일 때이다. 동동거리는 나에게 "정신없이 사는 그때가 인생 황금기야"라고 쓸쓸한 얼굴로 말해주는 어른들이 있지만 와닿진 않았다. 오히려 지금 당장 몸과 마음이 힘든 사람에게 남이 해주는 그때가 좋을때야라는 말은 왠지 더 신경질이 난다. 내가 타인에게 조언을 삼가는 이유다. 어차피 안 먹혀. 역시 인간이란 남의 조언을 듣고 깨닫기 보다는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것도 같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은 영원한 유행어겠지.


이렇게 우리는 보통 귓구멍을 틀어막고 살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현재에만 절절 매면서 사는 것도 애처롭다. 그래서 내가 발견한 방법이 있다. 가끔은 현재의 룰을 벗어난 예외적인 날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잠깐이나마 타임슬립을 경험하는 것이다. "과거의 나야, 이럴 줄은 몰랐지?" 하고 내가 말을 걸면 미래의 내가 돌아보며 "야 너나 잘해" 대화에 참여하는 식이다. 혹자는 명상같은 정신적인 방법으로 이 대화를 이끌어 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당장의 육체적 쾌락 역시 보장받기 위해 자유의 날을 종종 만든다. 이 방법은 대외비라 여기에 쓸 수는 없다. 어쨌든 어제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그랬다. "모두가 널 필요로 하는 시기에도 끝은 있어" 거기에 쓸쓸했던 어른들의 표정이 겹쳐지면 그때만큼은 잠깐 내 내면이 요동친다. 그래, 정말 그럴거야.. 겸허해질 수 있다.


이틀만에 만난 아이들이 무진장 반가웠다. 종알종알 떠들고 싸우고 이르고 떼쓰고 엄마를 수십번 불러대는 아이들의 소리도 평소보다 훨씬 애틋하고 사랑스럽게 들리기도 한다. 물론 잠깐 마실 차원으로 들렀던 미래의 내가 돌아가면 다시 으악 조용히 좀 해! 소리를 지르겠지만 그래도 과거와 미래의 우리가 잠깐씩 조우하는 바람에 나는 조금 마음을 진정할 공간을 확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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