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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Apr 23. 2020

낯선 이웃에게 전하는 인사

  어쩌면 이제는 대구에 정착할 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지 약 일 년만에 다시 분주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새 집을 찾고, 이제부터 나와 살아야 할 새 집기들을 골라 방 안에 들였다. 새로운 직장은 여지껏 경험해본 적 없는 분야의 직종이었다.

  어머니는 그 나이에 해본 적도 없는 일을 어떻게 하냐고 숱하게 걱정도 하셨지만 어머니의 염려가 오로지 새 직장생활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대개 야밤에 혼자 돌아다니다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지, 쌀 안 먹고 빵쪼가리로 끼니를 해결하지는 않는지 등속의.- 덮어놓고 다 잘 될 거라고만 했다.


  입사가 결정되고 약 일주일 간, 나는 통근 방법을 네 가지 정도 마련해 매일 같이 바꾸어가며 회사 건물 바로 앞까지 출근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집도, 새 직장도 낯서니 당일 놀랄 바에는 미리 몸에 배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실제로 내가 출근하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인가. 어느 만큼 피로해질 것인가. 대구에서 짐을 부치며 내가 상상한 거친 출퇴근길 모습에 현실을 직접 맞추어보았다.

  물론 내 상상이 현실과 같이 돌아갔던 적은 그리 많지 않다. 계획대로 된 적도 많지 않다. 지하철 1호선에는 잊을만 하면 예상치도 못했던 일들이 닥쳐왔다. 적당한 통근길을 찾아 익숙해지려던 내 원대한 야망은 습관적 연착과 불규칙적 기상시간에 익숙해지는 쪽으로 변질되었다.

 

  1월에는 새 집을 얻고, 이 보금자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한 몇 년간 앓지 않던 몸살도 겪었다. (그리고 다음 달이 되어 이걸 1월에 미리 앓아둔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났다. 해본 적 없는 일들을 허위허위 따라가느라 한 달과 두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일기장을 톺아보면 매일 같이 무언가 한 것은 맞지만, 그걸 논리정연하게 설명해보자면 '아무튼 배우려고 했다.'로만 수렴하게 된다. 아직도 이 일과 내 자리는 좀 낯설다.


  그 사이 내 보금자리와 나 사이에도 넉 달이라는 나날이 흘렀다. 제법 빼곡하게 우편물이 꽂힌 이 건물에서 누군가를 마주쳐본 적이라 해도 요 넉 달간 손에 꼽힐 정도다. 백이십 일에 이르도록 내가 마주친 사람이 이토록 적은 건 아마도 이들이 바깥에 나오기를 극단적으로 꺼리든가, 나와 비슷한 일상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내 방 양옆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한다. 내 바로 위층에 누가 사는지도 알 수 없지만 단지 상상할 뿐이다. 추정컨대 내 이웃들은 대개 나와 비슷한 시간대에 출근했다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분주하게 해야 할 것들을 하다가 또 얼추 비슷한 시간에 잠이 드는 것이다.


  일전에 살던 곳은 이제 막 대학생이 되었거나,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자녀와 함께 사는 부모가 많은 아파트였다. 그보다 더 전에 살던 곳은 낮과 밤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대학가였다. 나는 매일 같이 벽을 뚫고 들려오는 남의 프라이버시에 시달렸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그들이 알려주었다. 요즘 빠진 노래는 무엇이고, 현재 무엇 때문에 동거인과 갈등을 빚고 있으며, 지금은 어떤 영화를 보고 있고 어떤 운동을 하고 있는지 소리로 빠짐없이 알려주었다. 적당히 낯설어야 맞을 것들이 내 의사와는 매우 무관하게 내 삶에 젖어드는 기분은 썩 좋지는 않았다.


  낯설다는 표현은 언뜻 별로 좋지 않은 의미로 들린다. 적응이 어렵거나, 좀 어수룩하거나, 불편한 침묵이 생기는 까닭에 대개 낯설다는 표현이 인질처럼 끌려온다. 하지만 나는 낯선 것에 떠밀릴 때가 좋다. 좀 낯설어 봐야만 오래된 생각에 갇혀 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새것은 설다. 낯선 것도 새것이기 때문이고, 어설픈 것도 그것이 몹시 새롭기 때문이다. 설익은 것은 갓 익기 시작해 아직 붉지지 않은 까닭이고, 설날도 새날이라 설이라 한다. 낯설고 어설퍼도 나쁠 것이 없다.


  처음 이 집을 구하고 새 식구가 될 집기들을 사 돌아갈 때 마주쳤던 이 건물의 주민을 생각한다. 그는 건물 주차장 바로 앞에서 휴대용 버너에다 가재를 삶으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가재 사이즈가 제법 컸던 모양인지 라면 세 개를 한 번에 끓일 만한 냄비를 빨간 몸뚱이가 가득 채우고 있는 걸 어깨너머로도 볼 수 있었는데, 1월 초 즈음, 내 기억 속의 서울의 겨울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우스운 수준의 추위였지만 이래나저래나 빙점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바깥에서 그 가재는 제대로 익었을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가 정말로 이 건물에 사는 사람이었는지는 확답할 수 없다. 그러나 건물 코앞에서 그런 요란한 모습으로 앉아있었으니 어지간해서는 여기 주민이었을 것이다. 혹은 아주 자유분방한 영혼을 가졌든가.


  이 집에 들어앉은지 바야흐로 넉 달을 바라보는 지금, 나는 아직도 이따금씩 내 이웃들의 살음살이 모습을 어렴풋이 상상해본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나이대이거나 서너 해 더 많은 햇수를 살았을 나의 이웃들이여. 아침 여섯 시 반쯤 일어나 여덟시 반에 집에 돌아오고, 빨래와 설거지로 분주하게 집안을 돌보다 자정 무렵 잠이 들 것인 상상속의 내 이웃들이여. 이 어수선한 시절에 당신들은 안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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