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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Jun 22. 2023

ㅅㅅㄷㅂ : 미음 - 먹다

돌이켜봐도 결국 먹은 것만 떠오르는데

일본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때, 몸살이 나서 무섭게 앓은 적이 있었다. 온몸이 어디에 얻어맞은 듯이 아프고, 몸을 일으키면 눈앞이 빙빙 돌았다. 환절기가 되면 몸살감기를 호되게 겪곤 했는데, 그때는 어찌된 일인지 평소보다 몸이 더 고생스러웠다.

머리가 아프니 눈물이 찔끔 난다. 토할 것이 없는데 속이 메슥거려서 바닥을 반쯤 기어 화장실을 몇 차례나 왔다갔다 하고, 지쳐서 또 잠이 들었다.


“조셉 짱, 혹시 안에 있니?”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노크 소리에 놀라 문을 열어보니, 문틈으로 기숙사장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뭘 들고 서 있었다. 이틀 내리 아침을 먹으러 나가지 않으니 오바상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괜찮아? 아침 먹으러 오질 않길래 아픈가 하고. 죽을 가지고 왔는데.” 손에 들고 오신 건 후추가 살짝 뿌려진 노오란색 계란죽이었다. 


그때 얼마나 울었을까? 고마워서 왈칵 눈물이 솟았지만 남 앞에서 울면 못 쓰는 법이라 간신히 “고맙습니다.” 인사만 하고 책상에 앉았다. 육수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계란죽에 숟가락을 대는 순간, 계란죽에서 오르는 김과 눈물에 온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아주 오래된 기억들


나는 가벼운 치매 증상을 보이는 외조부모님과 조부모님 품에서 꽤 오래 자랐다. 대여섯 살 무렵의 일이라 대부분의 기억은 아주 단편적이고 불분명하지만, 어머니 표현을 따르면 ‘멀건’ 콩나물국에 콩밥, 간장, 소금 없이 구운 김으로 차려진 밥상의 냄새와 따끈한 촉감, 맛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여름엔 고춧가루도 없이 맑게 끓여진 국은 따로 떠먹고, 조금 뻣뻣한 콩나물을 콩밥에 얹어 간 마늘이 섞인 간장을 뿌리고 비벼 먹었는데, ‘골드스타’ 로고가 박힌 선풍기 앞에서 먹는 그 밥이 어린 입에도 참 별미였더란다.


조부모님 댁 근처에는 두부 공장이 있어서 아침 일곱 시 쯤 찾아가면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두부를 살 수 있었다. 몸이 불편한 친구가 그 골목길에 살아서, 등교는 그 친구와 겸사 같이 했었는데, 아침 천 원짜리 두부를 사러 가면서 친구에게 몇 시쯤 나올 거냐고 묻곤 했다. 

그 친구네 어머니는 여름이 되면 곧잘 집에 놀러오라고 초대해주셨다. 뭘 먹고 왔다고 해도 쫄면을 한 양푼이 비벼서 얼음을 잔뜩 넣은 토마토주스나 감귤주스를 함께 내어주셨는데, 실례인 줄도 모르고 저녁까지 얻어먹고 오는 일도 종종 있었다. 


십 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래된 기억들 속에는 먹을 것이 하나씩 끼어있다. 한 끼에 만 엔이 훌쩍 넘어가던 멋지고 비싼 식사 같은 건 그 맛이 잘 생각나지도 않는다. 


새삼 무엇을 잘 먹은 기억은 애틋하고 좋다. 

여행 내내 앓다 처음 먹은 미타라시 당고의 맛을 십오 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해 도일할 때마다 찾아먹을 정도로 강한 애착을 품고 있는 동생이 그렇듯이, 추운 날 야외 행사를 진행하고 가까운 편의점에서 뜨거운 물부터 부어 그대로 마셨던 인스턴트 된장국이 일생의 된장국으로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아있듯이. 


이게 전부인가?


요즈음 부쩍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난 소중한 친구는 나에게 늘 따뜻한 음식을 차려주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상경하고 나서 가장 힘들었을 무렵의 일이다. 마감직에 종사하게 되어 매달 말일이 다가올 때마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일에 치여 지냈다. 불면증은 예사였고, 한 번 잠이 들어도 무언가에 쫓기듯 벌떡 일어나기 일쑤였다. 서울에 올라와 하고 싶었던 많은 것들은 휴대폰과 유튜브로만 볼 수 있는 남일이 되어버렸고, 지방에선 꿈만 꾸던 온갖 새로운 경험들은 무한정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할 일로 미루어졌다.


하루가 자는 것 같지도 않은 잠과, 일, 먹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먹는 것도 시간에 쫓기니 편의점과 김밥천국, 패스트푸드점을 번갈아 돌며 먹게 되었다. 자리에 앉아 일을 하면서 먹을 수 있는 것들. 똑같은 포장지를 두르고 나란히 놓인 끼니들. 

하루가 이 모양이니 연인과도 금세 헤어졌고,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전화를 해도 할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여전히 바쁘고’, ‘여전히 피곤하고’, ‘밥은 살아야 되니 대강 때우기는 하는’ 하루가 이어졌다. 급여는 형편 없었고, 좀 더 잘 받았단들 그 급여를 쓸 시간은 있었을는지 의문이 드는 일상이었다.


사는 것이 정말 이게 전부인가? 


나는 서울에 왔는데…….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다 똑같은 표정으로 바닥만 보고 있었다. 즐거워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나쁜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평생 들어본 적이 없는 생각이라 오히려 두려웠다. 어떻게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주변은 변하는 것이 없는데, 나만 나쁘게 변하는 것 같았다.


이 무렵의 나는 내가 떠올리는 한 가장 슬프고 외로운 시절에 살고 있었다.


이 때 좁다란 자취방에 불러 라면과 육개장을 끓여 앞에 놓아주고는 사는 것은 어떠냐고 묻던 친구가 기억난다. 나는 그때도 ‘바빠서 못 간다.’고 거절했다. 가봤자 네 집에서 일을 하게 될 거라고 했더니 그럼 와서 일을 하란다. 이쯤 하면 가지 않을 이유도 더 없어서, 반갑고 기쁘다기보다는 거절하기 지쳐서 짧게 야근을 하고 그 집으로 퇴근했다.


근처 초밥집에서 포장해온 모듬 초밥과 육개장을 사이에 두고 말 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친구는 작업을 하는 공간과 조그마한 침실을 소개해주었고, 괜히 냉장고도 열어보여주었다. 어묵이 너구리 모양으로 잘려 나온 라면 앞에서는 좀 웃었다. 


그 때 대접받은 '따뜻한' 한 상. 누군가가 나를 위해 차렸다는 것이 그저 기뻤다.


새벽 세 시가 넘도록 일을 끝내지 못해 초대받은 그날도 따뜻한 국물을 먹고 일을 좀 하다 잠이 들었는데, 열흘 만에 정말 달고 깊게 잤던 기억이 난다. 대화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초대받은 집에서까지 일거리를 붙들다 말도 없이 잠이 들었는데 서운한 기색도 없이 ‘잘 자는 것 같아서 좋았다.’는 친구의 말은 얼마나 따뜻하고 기꺼웠던가.


그 뒤로도 출근길에는 종종 나쁜 생각이 스쳐지나가곤 했다. 그 때마다 남이 차려주었던 그 늦은 밥상을 떠올렸다. 내가 나를 위해 차린 것이 아니라 누가 나를 위해 차린 상이 한 번씩……. 그 기억이 불쑥불쑥 솟는 나쁜 생각을 어떻게든 밀어냈다. 대단한 것이 올라오지 않아도 누가 나를 위해 차린 상이라는 것이 그렇게 위안이 되었다.


지금도 종종 울적하고, 종종 슬프지만, 대단히 나아진 것은 없지만 대체로 행복하다.

먹는 데에 쓰는 시간을 좀 더 늘릴 수 있게 되었고, 좋은 재료를 골라 나와 남에게 차릴 음식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주변은 변하지 않는 것 같고, 나도 그다지 변한 것이 없는 듯한데 왜 지금의 나는 괜찮은가.

사는 것은 이런 게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 다정하고 간절한 기억을 결정하는 게 무엇인가 생각하면 괜히 속이 든든하다. 





사는 것이 정말 이게 전부인가?

오래된 기억들, 좀 좋은 기억들이 몽땅 먹을 것에 얽혀있는 것을 보면 사는 것은 먹는 것이 다일지도 모른다. 그게 꼭꼭 씹어 삼켜야하는 먹을 것이든, 마음과 생각으로 깊게 들이켜야하는 먹을 것이든. 


이게 전부인가? 

이게 전부가 아니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 돌이켜볼 것은 먹는 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잘 챙겨먹었니, 조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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