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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Jul 25. 2023

ㅅㅅㄷㅂ : 비읍 - 바람

빗소리는 좋은데 장마는 싫어서.


자타가 공인하는 ‘싸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사람이다보니, 부쩍 울적해지는 시기가 있다. 바로 이 무렵이면 오는 장마다. 짧은 변호 차 덧붙이자면 빗소리와 비 냄새는 좋아한다. 비를 맞는 건 싫지만 창을 거세게 두들기며 쏟아지는 빗소리는 없던 운치도 만들어준다.

요즘은 비가 길어지고, 많아지고, 잦아지면서 애달픈 소식이 부쩍 자주 들리게 된다. 장마가 사람을 슬프게 만든다.


지난 오십삼일에 걸친 장마 기간 내내 마음이 서럽고 무거웠던 기억이 난다. 아침부터 먹구름이 낀 하늘을 보고 나와서, 점심시간을 틈타 햇볕을 쬐러 나가도 추적추적 비가 내리거나, 눅눅한 습기로 가득찬 공기가 후텁하게 데워져있었다. 비가 내릴 때는 신발이 다 젖어버릴까봐 신경이 쓰였다. 스타킹과 구두 사이에서 꼬릿한 냄새가 나진 않을지 날만 맑았으면 안 했을 걱정이 더해졌고, 얼룩덜룩하게 스타킹을 적시고 사무실에 들어오려 하면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방과 우산과 도시락 가방하며 손짐을 챙기느라 두손도 바쁘고 웅덩이를 피해야 하니 두발도 바쁘다. 사지가 모두 여유가 없다.

워낙 오래도록 울적해했더니 동거인이 조심스럽게 울적하냐고 묻는다. 솔직하게 그렇다고 하고, 이상하게 슬픈 기분도 든다고 했다. 좀 울적할 땐 실컷 울적해하라며 기나긴 장마 기간 내내 사랑한다는 말로 기운을 돋우어주었는데, 답을 돌려준 적은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말자, 적어도 “사랑해.”라는 말은 거짓말로 하지 말자고 약속을 해두어서, 사랑한단 말을 하고픈 기분이 아닐 때엔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좋은 햇볕, 즐거운 사람들의 인상을 맞으며 나들이를 가고 싶다. 비가 오는 바람에 바람 쐬러도 못 나가는 게 공연히 억울하다. 평소엔 실수로 떨어트린 베이글이 주방 바닥에 두르르 구르는 것도 우스워서 허파에 바람 든 마냥 숨도 못 쉬고 웃는 사람인데 어쩌다 이렇게 울적해졌을까! 나는 매일매일 신나고 행복한 사람인데 이렇게 슬퍼질 수 있다니!


바람이 필요해


왜 긴 비는 사람을 슬프게 할까. 비는 싫다면서 잠을 청할 때면 간사하게 찾는 빗소리는 왜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축축하고 서러운 정서를 부르는가. 슬퍼할 일도 없는데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거리고 있자니 슬그머니 옆에 누운 동거인이 또 조그맣게 속삭인다.


“바람 쐬러 나갈 일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내가 슬픈 건 다 비가 오는 바람에, 바람 쐴 수가 없어서, 허파에 바람을 채울 수가 없어서.


이번 주말에 바람 쐬러 나가면, 허파에 바람도 좀 채우고 올까보다. 우선은 동네부터 좀 돌아볼까나.

윤흥길 님의 유명한 작품 속에서 한 줄을 가져다쓰며 이제 진짜로 ‘바람 쐬러’ 나간다.



“이런 집에선 더 있을래도 안 있을란다.”

윤흥길, <장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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