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네에는 이른바 '그 동네'의 색깔이 있습니다. '서촌 느낌', '홍대 감성', '성북동 스멜'이라고 하는 특유의 분위기입니다. 팬데믹 이후 많은 질곡이 있었지만 여전히 그 동네만의 특색은 긴 설명 없이도 동네 이름만으로 전달됩니다.
중화민국 본적의 화교들이 많이 사는 인천의 차이나타운과 높다란 아파트와 독특한 외장의 비즈니스 호텔이 즐비한 반포역에서 한 블록만 더 가면 펼쳐지는 프랑스 마을, '서래마을'은 당시 저에게는 별세계였습니다.
한편 두서 없이 되는 대로 들러붙은 낡은 간판의 향연은 어떻습니까. 인쇄기 철컥거리는 소리 틈으로 열을 받아 비릿하게 뜬 잉크 냄새가 물씬 피어오릅니다. 커다란 소음 때문에 사장님과 손님의 모든 대화가 고함소리로만 이루어지는 충무로 거리는 제가 좋아하는 '길' 중 하나입니다.
그 길에 놓인 많은 사연들은 길고 복잡한 설명이 없어도 '그래, 그랬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한 번도 그 동네에서 살아본 적이 없지만 그 장소가 좋은 이유가 온갖 비언어적 감각을 통해 정의됩니다.
작년 겨울 오랜만에 성북동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연구자료 수집이 필요해 한용운의 유택 '심우장'을 방문해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마을버스도 힘겹게 올라가는 꼭두지른 언덕에 버섯머리 같은 집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은 것이 보입니다. 담벼락도, 대문도 편평한 곳에 만들어진 것이 오히려 드문 곳입니다. 이따금씩 좌우를 둘러보면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한 골목에 아무렇게나 시멘트질을 해 만든 길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도 빨랫줄과 우편함을 놓아둔 작은 집들이 비집고 들어앉아있고요.
지번도 붙지 않은 작은 골목들은 행정적으로는 없는 곳이겠지만, 분명히 있는 곳입니다.
북정마을 꼭대기에 자리한 심우장은 관리인 몇 분을 제외하고 나면 인적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갔던 날에도 사람이 없어 바람에 나뭇가지 쓸리는 소리도 참 크게 들렸습니다.
오는 길이 녹록지 않기도 하고, 이렇다할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꼭 가볼만한 곳이냐'라는 질문에는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운 곳이기는 합니다.
어쩌면 어떤 학문적 데이터가 필요했다면 굳이 심우장을 찾아올 것까지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정보는 딸에게 직접 가보라고 얘기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으로 얻을 수 있었을 테고요.
그런데 아버지의 궁금증을 풀어드리려면 어떻든 눈이 내린 성북동을 굽이굽이 올라야했습니다.
그 궁금증이란 게 "심우장에서 정말 북한산이 보이느냐."였거든요.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북한산이 보였냐고요? 그게 궁금하면 당신은 '굳이' 북정마을에 올라보셔야하는 분입니다. 마침 '굳이'는 요즘 트렌드잖아요.
<봄이 오면 대가야로 간다>, <홀로 마감하는 박물관 직원>, <눈이 내린다. 밤의 끝이 하얘졌다>.
유튜브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플레이리스트들의 제목입니다. 소위 '과몰입'을 돕는 제목들이 눈에 띕니다. 조회수도 심상치 않은데, 댓글은 더 재미있습니다.
'그냥 자소서 쓰는 중인데도 내가 대단한 일 하는 느낌', '내가 고독을 이겨내는 문학가가 된 것 같다', '현실이 힘든데도 이 음악이 흐르는 댓글창은 너무나도 따뜻하다'…….
먹고 살기 힘들어지니 남에게 마음을 써줄 여유가 없다고들 합니다. 당장 나 살기가 어렵고 벅찬데 남 사정까지 헤아릴 겨를이 없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유난히 바쁘고, 빠듯하고, 삭막하게 느껴지는 시기입니다.
즐거운 소식 듣기는 또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현실이 힘들어도 따뜻하게, 별 거 아니어도 대단한 일처럼, 고독을 의연하게 이겨내는 문인처럼, 좀 과몰입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