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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일기

최진영 《홈 스위트 홈》

2023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by 별난 감자


souvenir


학교 가는 길에 있던 카페 이름이다.

영어를 잘 몰라서 그림처럼 기억하고 있던 단어를

여행지에서 만나 '기념품'이라는 뜻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후에 함께 철학을 전공했던 남자친구로부터 철학용어 'souvenir'에 대해 듣게 되었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기억을 두 가지로 해석하는데

하나는 '습관-기억(memoire-habitude)' 다른 하나는 '이미지-추억(souvenir-image)'다.

'습관-기억'은 반복적 노력이나 실험을 통해서 가능한 기억이다.

글쓰기, 밥 먹기, 피아노 연주하기와 같은 상황은 '습관-기억'을 통해 지속적으로 소환되고 행해진다.

이와 달리 '이미지-추억'은 어떠한 작위적인 노력 없이 강렬한 경험으로 인해 저절로 인간 주체에 보존되었다가, 현재의 자극이나 요청에 따라 떠오르는 기억이다.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시각화한 물건에도 역시 'souvenir(기념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를테면 EXO의 '12월의 기적'이라는 노래를 들으면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11시 30분 경의 깜깜한 밤에

정보가 없어 끊겼을지도 모를 차를 기다리며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맞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누군가는 이 노래를 들으면 사랑했던 연인이, 함께 들었던 친구가, 혹은 가사나 노래와 관련된 재미있는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내가 깜깜한 밤에 함박눈을 맞으며 이 노래를 들었다고 누군가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더라도

이 기억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유일한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나'를 구성하는 기억들을 souvenir라고 한다.





최진영의 <홈 스위트 홈>은 이러한 souvenir의 개념을 소설로 풀어낸 듯한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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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누구를 위한 문학상인가에 대한 고민은 끊임없이 있지만

그래도 명색이 현대소설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인데 주목받는 작품은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전에 서점에 갔을 땐 2022년까지밖에 출간되지 않아서 돌아왔는데

오늘 갔을 땐 2023년 작품집이 출간돼서 잽싸게 가져왔다.

(정확히는 같이 간 손자까님이 사주셨다 ㅎㅎ)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그리고 코로나19 시기에도 '여성문학', '페미니즘 문학'이 유행할 때라

대부분의 문학상은 거기에 온통 집중되어 있었다.그런 류의 소설들을 불편해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수상작이 모두 결이 비슷하니 아무래도 손이 안 갔던 건 사실이다.

이번에는 마침내 그 틀을 깨고 다른 결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요즘 문학, 영화를 포함한 '문화'의 트렌드는 멀티버스, 우주, 그리고 시제(時制)인 것 같다.

심지어 오늘은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영화를 보고 온 날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멀티버스 이야기 그 자체다.)


소설은 암에 걸린 화자가 시골에서 살 집을 구하고 청소하며 일어나는 일들과 생각들을 다루었다.

누군가는 지루하거나 잔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렇게 자극적인 사건이 있기보다는 혼자 조용히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질문하고 답하기를 반복하는 글들을 좋아하므로 취향에 꼭 맞았다.


작품집 한 권에 몇 페이지 되지도 않는 단편들을 따로따로 정리하는 건 약간 비겁해 보이지만

그렇게 하나씩 별개의 작품으로 보는 게 편하므로 틈틈이 한 편씩 읽고 한 편씩 남겨보려 한다.


아래는 기억에 남아 담아두었던 글들.





pp.13-14.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와 함께 사라져 버리는 무수한 순간들

(중략)

아주 많은 것을 잊으며 살아가는 중에도 고집스럽게 남아있는 기억이 있다. 왜 남아있는지 나조차 알 수 없는 기억들. 나의 선택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나를 선택하여 남아있는 것만 같다.


p.19.

나는 엄마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나와 가장 닮은 사람. 내가 나이 들면 저런 얼굴이겠지.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가 눈을 떴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엄마는 나를 보며 과거를 생각할까?


p.31.

누군지 몰라도 한 번에 많이도 컸네. 훌쩍 크려면 아팠을 텐데.


p.31.

이런 기억은 오직 나만 아는 것. 나만 기억하다가 나와 함께 사라지는 것.


p.35.

내게 남은 기억, 나와 함께 사라질 기억. 나는 육체고 이름이며 누군가의 무엇이다. 그러나 그보다 깊은 영역에서, 나란 존재는 나만이 알고 있는 기억의 합에 더욱 가까웠다. 사람들이 말하는 영혼이란 기억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p.37.

여름날 땀 흘린 뒤 시원한 찬물 샤워. 겨울날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바라보는 밤하늘. 잠에서 깨었을 때 당신과 맞잡은 손 마주 보는 눈동자. 같은 곳을 향하는 미소. 다정한 침묵. 책 속의 고독. 비 오는 날 빗소리. 눈 오는 날의 적막. 안개 짙은 날의 음악. 햇살. 노을. 바람. 산책. 앞서 걷는 당신의 뒷모습. 물이 참 달다고 말하는 당신. 실없이 웃는 당신. 나의 천국은 이곳에 있고 그 또 한 내가 두고 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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