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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일기

루리《긴긴밤》

반짝이는 별빛, 그 속에 담긴 수많은 고민의 시간들

by 별난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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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 당연히 쉽게, 밝게 써져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편견을 깨부수는 책이었다.

나의 삶이 오로지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내가 고통으로 지내는 순간이 단순한 고통이 아닌 성장통이었음을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인내와 고통이 필요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희망적이고 또 대단한 일인지 많은 생각이 드는 책.


아동문학이라면 나는 절대 읽지 않았을 장르지만 선물을 받은 덕에 읽을 수 있었고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 줄거리 >

코뿔소인 노든은 어린 시절, 코끼리들과 함께 지냈다.

가족을 잃은 코끼리들을 위해 사람들이 지은 코끼리 고아원이었는데,

코뿔소인 노든이 왜 이곳에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고 지혜로운 코끼리들 사이에서 행복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

가끔 고아원에 찾아오는 까마귀는 고아원 바깥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노든은 자신과 같은 코뿔소가 있다는 사실이 궁금하고 신기했다. 그래서 인간들의 테스트를 통과해 바깥 세상에 나가기를 택한다.



노든은 자연에서 코뿔소들을 만나고 그들과 생활하며 아내를 만나고 예쁜 딸도 낳는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인간들에 의해 아내와 딸을 잃는다.

노든은 그렇게 동물원에 와서 같은 코뿔소인 앙가부를 만난다.

앙가부에게 바깥 생활의 이야기를 하며 함께 탈출을 꿈꾸지만 노든이 잠깐 치료를 받는 사이에 앙가부는 뿔 사냥꾼에 의해 뿔이 잘린채 죽는다. 그렇게 노든은 뿔이 반이 잘린 채 동물원에 남았다.

(노든도 뿔사냥꾼에게 사냥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동물원 사람들이 뿔을 잘랐다)



한편, 같은 동물원(파라다이스 동물원) 펭귄 우리에서는 어미가 없는 버려진 알이 발견되었다.

펭귄들은 새끼를 키우는 것에 유난히 신경쓰기 때문에 이런 일은 극히 드물다.

치쿠와 윔보는 누구도 돌보지 않는 그 알을 돌보기 시작한다.



앙가부와 노든이 탈출을 계획하고 열심히 뜯어놓았던 철조망.

앙가부가 죽은 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철조망이 무너지면서 불이 났다.

그 사고로 인해 사자, 표범, 얼룩말 등 많은 동물이 죽었다.

노든은 도망치다가 양동이에 알을 담아 입으로 문 채 탈출하는 치쿠를 만나게 된다.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 치쿠를 위해 윔보는 치쿠의 오른쪽에서 자다가 봉변을 당했다)


그렇게 그들은 동물원을 탈출하고 악몽을 꿀까봐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긴긴밤을 겪게 된다.



노든과 치쿠는 살기 위해 몇날몇일을 걷는다. 아니, 알까지. 노든과 치쿠와 알은 살기 위해 걸었다.

하염없이 걷던 그들은 '바다'를 목적지로 삼고 걷기 시작한다.

동물원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치쿠는 바깥 세상을 다닐 수록 점점 수척해져갔다.

'함께'있기에 할 수 있었지만 '함께'여도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치쿠는 얼마 못가 죽었고 노든은 치쿠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알을 보살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알이 깨어났다.


노든은 펭귄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나'를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먼저 간 아내와 딸, 치쿠와 윔보를 위해 열심히 살아갔다.

바다대신 호수를 발견하게 되지만 '나'는 펭귄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수영을 할 수 있고

노든은 그런 '나'를 보며 뿌듯해하고 치쿠가 보면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노든과 '나'는 동물을 공격하는 인간들을 피해 도망쳤지만 오랜 바깥 생활로 지친 노든은 결국 쓰러지고 만다.


좋은 인간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끌려온 노든은 주사를 맞고 영양제를 맞았지만 기력은 쇠퇴해갔다.

노든의 마지막 밤, 펭귄인 '나'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작별을 한 뒤 '나'는 바다를 찾아 떠난다.

그렇게 '나'는 바다를 찾았다.






p.57.

노든은 악몽을 꿀까 봐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날은, 밤이 더 길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이후로도 그들에게는 긴긴밤이 계속되었다.


긴긴밤이라는 제목의 뜻을 알고 깜짝 놀랐다.

위에서도 말했듯 어린이문학상, 아동문학이기 때문에 밝고 희망찬 내용일 줄로만 알았는데

악몽과 두려움으로 잠들지 못하는 '긴긴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내가 지나쳐온 수많은 '긴긴밤'이 떠올랐다.


참 많은 긴긴밤을 지나왔지만 '2019년 가을'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그때는 밤도 참 길었지만 계절도 참 길었다.

오은 작가의 <계절감>이라는 시의 한 구절.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


누군가에겐 잠깐 눈붙이고 나니 밤은 사라지고 아침이 왔겠지만

누군가는 그 아침을 간절히 기다리며 어느 때보다 길고 긴 밤을 보낸다.

그 시기 나는 지독히도 외롭고 괴로웠지만 그 때의 아픔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pp. 67-68.

언제나 그랬다.

노든은 옛날 기억에 사로잡힐 때마다 앞으로 걷고 또 걸었다. 노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2020년 4월부터 7월.

우울증이라고 하기엔 민망하고 슬럼프라고 하기엔 심각했던 날들이 있었다.

분명 아무 문제가 없는데 너무 힘들었다.

난 아직도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그때 감정은 무엇이었는지 설명할 수도 알 수도 없다.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버티기'밖에 없었다.

그저 운동을 하고 피아노를 치고 책을 읽으면서 안좋은 감정에 둘러싸일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했다.

그렇게 버티고 버텨 결국에는 벗어났지만 지금 생각해도 버티는 것 말고는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예전에 어딘가에서 안 좋은 일을 겪었을 때

'시간이 지나서 그 일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서 조금 더 자란 내가 해결해준다'

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난 그 말을 믿고 또 당시에 굉장한 위로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조금 슬프고 힘들지만 이 고통이 영원하지 않을 거란 걸 안다.

피하기 힘들다면 그 고통을 오롯이 느끼는 것도, 내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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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 99.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노든, 치쿠, 윔보처럼 이름을 갖고 싶어하는 새끼 펭귄 '나'에게 노든이 해준 말.


유미의 세포 순록이도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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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웹툰 <유미의 세포들>

나를 이해시키려하지 않아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애써 내 감정을 다 설명하지 않아도, 내 생각을 일일히 읊어주지 않아도

나에게 집중하고 내 기분을 살펴 내 감정의 원인을, 내 생각의 흐름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사람이 오래도록 내 옆에 남아주면 더욱 좋겠지!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우선은 나를 먼저 파악하는 거로!





p. 116.

이리 와. 안아 줄게. 그리고 이야기를 해 줄게.

오늘 밤 내내 말이야. 오늘 밤은 길거든. 네 아빠들의 이야기를 해 줄게.

너는 파란 지평선을 찾아서, 바다를 찾아서, 친구들을 만나고, 우리 이야기를 전해 줘.


'이리 와, 안아줄게'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세상 가장 따뜻한 말이 아닐까 싶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신효범 - 자장가>에도 나오는 가사.

'포옹'이라는 것은 가장 크게는 사랑을 의미하지만

말 그대로 감싸 안거나 위로를 전하는 행위, 의도 그 자체를 모두 아우르는 말인 것 같다.


깊게 파묻혀 안고(혹은 안겨)있으면 상대방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아이가 엄마 심장소리를 듣고 안심하듯이, 심장소리가 들릴만큼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가까운 상대로부터 안정감을 느낀다.

그 안에서 위로와 안식, 충만함을 느낀다.


포옹은 그 어떤 위로보다 가장 강한 것 같다.

때로는 번지르르한 말보다 눈빛, 작은 행위에 더 마음이 동할 때가 있다.

이게 바로 언어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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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쉴레, 포옹(연인) / 구스타프 클림트, 포옹




p. 125.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성장통으로 아파하는 시간을, 두려움과 걱정으로 지새우는 밤에 비유한 것도

그 긴 시간 끝에 찾은 해답을, 긴긴밤에도 반짝이는 별에 비유한 것도 정말 감탄 그 자체.


정말 부럽다 이 감성, 이 생각....


심사평도 기억에 남는다

"둘의 걸음에는 고통이, 슬픔과 분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붙잡아야만 하는 희망과 오늘이 있다"


난 이렇게 내가 느낀 것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내가 소설을 공부하는 이유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보다 정확하고 뚜렷하게 이해하고 싶어서.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나를 향해 있던 모든 이의 긴긴밤을 그 눈물과 고통과 연대와 사랑을 이해한다.

그리고 내 몫으로 남겨둔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견디고 극복하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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