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별
타인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글은 나를 이해하기 위해 쓰는 것 같다.
나를 들여다보고 나의 생각을 마주하고 나를 정리하고 표현하는 최적의 수단이기도 하다.
어쩔 땐 말보다 강력하지만 말은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들리는 것과 달리 글은 읽지 않으면 영영 알 수 없기 때문에 무력한 것 같기도 하다.
인공 지능이나 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챗GPT가 그렇게나 유행하고 있는데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인공 지능을 이야기하면 반드시 도달하는 결론, '인공 지능이 고도로 발달되어 역으로 인간을 지배하다면'이라는 가정이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사는 동안 안에 이루어질 수도 혹은 먼 미래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지구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건 싫다.
(추정컨대) 46억 년이나 존재했고 또 그에 상당하는 억겁의 시간만큼 존재할 지구의 운명을 논하는 것은 쓸데없다고 느낀다.
만약에-를 좋아하는 나지만, 상상하기 싫은 것도 있는 법이다.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만 생각해도 끔찍하고 울컥하는데 이 모든 인류가 사라지는 멸망의 시대를 상상하는 건 도무지....
그럼에도 SF소설을 좋아하는 건 모순적일까.
대부분의 SF소설은 지구의 멸망, 지구가 아닌 또 다른 거주지, 인간의 진화나 외계인, 인간으로부터 기원한 우주적 존재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인공 지능의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말이지만 우주를 이야기하면서 '차원이 다르다'라는 말을 쓰는 건 뭔가 더 비장한 느낌이다)
기계에 문외한인 심지어 인공 지능을 싫어해서 뉴스 기사조차 읽지 않아 일반 사람들보다 더 그에 대한 정보가 없는 내가 인공 지능의 반란과 혁명으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을 고안해내야 하는 상황보다는, 이미 지구는 사라지고 없어 지하 세계나 수명이 짧은 세계에 살아가면서도 서로 가까워지려 하고 이해하려 하는 우주적 존재들의 이야기는 훨씬 더 희망적이고 낭만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이 나의 흥미를 끄는 우주에 대한 이야기라도 논문보다는 소설이 매력적인 거겠지.
아닌가,
원래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던 나의 마음 속 깊이 잔재하는 어떠한 욕구일까?
책을 두루두루 읽기보다는 특별히 좋아하는 몇몇의 작가들의 작품만을 읽는 편이다.
(뚜렷한 주관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미 베스트셀러로 유명한 김애란, 최은영, 김초엽, 정세랑, 박상영, 천선란 등을 좋아한다)
그 작가의 상상력과 표현법이 맘에 들어 작품을 고르는 거지 작가에 대한 관심은 딱히 없었는데 최근에 김초엽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됐다.
어쩐지 내용이 재밌고 탄탄하다 했더니 이공계열로 대학원까지 졸업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놀랐던 건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
물론 장애는 특별함이 아니라 그저 다른 일부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것이 소외된 사람들을 주로 이야기하는 작품 세계와 반드시 관련이 있을 거란 보장도 없다. 그리고 작가 역시 자신의 능력과 장애는 확실하게 구분 짓는다.
작품은 작가의 어떠한 부분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까?
아무튼 잠이 오지 않아 소설이나 읽어볼까 책장을 보다가 표지가 가장 화려한 책을 골랐다.
그게 김초엽의 <방금 떠나온 세계>이다.
7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마지막 '캐빈 방정식'을 빼고는 다 지구 멸망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특히나 '뇌', '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게 흥미로웠다.
철학도 문학도 단순한 현상과 텍스트를 넘어,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원천 그리고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인지적 작용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과학 역시 그러한 세계로 넘어가고 있는 걸까.
천문학자나 행성 연구자들은 이미 지구의 멸망을 염두에 두고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간이 살 수 있는 또 다른 행성을 찾아 헤매고 있을까?
가장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과학자들은 어쩌면 전혀 반대로 꿈꾸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또 무엇을 알고자 하는 걸까.
몸은 이곳에 있지만 생각은 몇 억년, 아니 몇 광년을 앞서 가있는 걸까?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직 김초엽의 책을 전부 읽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공통점은 '소외되거나 어딘가 결함이 있는 사람(혹은 존재)이 특별함을 마주한다'는 것.
단순히 장애나 신체적 한계의 극복을 넘어, 소외되었기에 진입할 수 있었던 내면의 세계를 더 깊이 마주하는 것 같다.
김초엽의 소설은 서로 전혀 다른 존재들이 다른 언어와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하고 닿으려고 한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잠깐이라도 서로를 인식했다면, 다른 시간을 살아도 함께 시간을 살고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우리는 다르게 보고 듣고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말로 각자 다른 인지적 세계를 살고 있다. 그 다른 세계들이 어떻게 잠시나마 겹칠 수 있을까."
- 작가의 말 中
<마리의 춤> pp.67-68.
인간이 보는 세계는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인지 체계를 통해 재구성된 세계이기 때문에, 재구성에 실패한 모그들의 세계는 파편화된다. 흩어진 퍼즐 조각, 여러 빛깔의 안개, 색면의 추상화. 어떤 이들은 낭만적 대상화의 일종으로 그들을 '추상의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묘사가 정말로 모그들의 세계와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지도 교수님이 이 책을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 궁금했던 대목이었다 ㅋㅋ
동시에 내가 소설을 연구하며 고민했던 것들이 어쩌면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인간이라는 종의 공통성에 기반해 똑같은 물리적 작용에 의해 인지 구조화가 일어나겠지만 그 결과는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는 함께 살고 있지만 다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한 사람이 하나의 우주라는 이야기는 낭만적이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를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될까?
<로라> p.119.
글은 진이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이었고 진은 로라의 내면을 알고 싶었다.
타인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글은 나를 이해하기 위해 쓰는 것 같다.
나를 들여다보고 나의 생각을 마주하고 나를 정리하고 표현하는 최적의 수단이기도 하다.
어쩔 땐 말보다 강력하지만 말은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들리는 것과 달리 글은 읽지 않으면 영영 알 수 없기 때문에 무력한 것 같기도 하다.
<로라> p.126.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상대방의 모든 모습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일까, 이해가 안되더라도 그 모습마저 품는 것이 사랑일까.
애초에 이해가 안되는 것을 품는다는 것이 말이 되나? 말도 안되는 일을 하는 것이 사랑인가.
<숨그림자> p.182.
이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곳을 덜 미워하게 하지는 않아. 그건 그냥 동시에 존재하는 거야. 다른 모든 것들처럼.
정세랑의 <지구에서 한아 뿐>이 떠올랐던 대목.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들과 함께 있는 공간까지 사랑할 수는 없고
불편한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과 함께 작용하는 모든 것들이 불편한 건 아니다.
죽을 것 같이 힘든 상황에서도 위로가 되는 순간들이 있지만 그것이 고통을 옅게 해주는 것은 아니며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100% 행복으로 채워져있지는 않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우울, 좋음과 나쁨의 상태는 항상 함께다.
<오래된 협약> p.202.
아득한 사건을 순간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우주 여행자들의 습관이라던가요.
미래를 약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당장의 한 시간 이후의 일, 당장 내일의 일에 대해서는 약속할 수 있겠지만 10년 뒤의 일을 약속할 수 있을까?
내가 27살이기에 10년 뒤를 약속할 수 있는 걸까, 80살의 나는 10년 뒤의 약속을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유한하기에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인지공간> p. 269.
나는 세 번째 달을 잊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너도.
우리 모두의 생각과 기억이 이어져있다면 생존과 발전에 필요하지 않은 사사로운 일들은 지워지고 말까.
아니, 그것들이 사사로운 일일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굵직한 순간들만이 나를 이루고 있지는 않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일으르 이야기하며 느꼈던 편안함은 이야기 상대와의 관계에 작용하고 있으며
땅거미진 하늘, 하늘색과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인 하늘은 볼 때마다 나에게 늘 한결같이 행복감을 준다.
어린 시절 10년의 기억이 지금은 몇 가지 조각난 기억들로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결코 대단하거나 극적인 일들은 아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내 안에 남아 나를 변화시키고 또 되돌아오게 만든다.
사사로운 일이란 없고 사사로운 감정이란 더더욱 없다.
찰나의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들마저도 나를 이룬다.
그렇게 나는 유일한 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