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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Oct 20. 2023

더하기 산부인과

아무튼, 의사

나는 내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가끔 꿈이라 생각될 정도로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는데, 그도 그럴 것이 결혼이라는 것을 하기 힘든 사람이라 나를 정의 내렸고 나아가 누군가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대단한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준비되어 나오지 못한 탓에 자격 미달이어도 상황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고 살아내다 보니 결혼도 임신도 출산도 겪게 된 것이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아이가 생기겠지-하고 여유 부리던 마음은 1년이 지나자 조바심으로 바뀌었다. 여러 번 시도 끝에 임신 소식을 알게 되고 나는 처음 산부인과에 방문했다.

생리통도 심했었고 자궁경부암 예방접종의 필요성을 알고 있기에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끝내 발길을 돌리게 되었던 이유는 골반 내진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 때문이었다.

거울로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한 나의 생식기를 그 누가 되었든, 그게 의사여도 보이고 싶지 않고 성교통의 아픔을 경험한바 손가락 두 개가 자궁 안으로 들어와 진찰한다는 상상만 해도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생명'과 '호기심'이라는 두 단어가 지워준 덕분에 산모 수첩을 받고 진료를 받기 위해 다리를 벌리고 의자에 앉아있는 그 시간도 견뎌내게 해 주었다. 

    

선한 인상의 눈썹이 짙은 산부인과 의사인 그는 나의 걱정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힘 빼라는 말 대신 축하한다고, 아이 태명은 지었냐고, 건강하게 잘 태어날 거고 본인이 도울 테니 염려 말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잘하고 못하고 있는지나, 나에게 책임을 지우는 내용이 아니어서 고마웠다. 그런 배려가 귀한 시대니까.     

주수에 맞게 빠지지 않고 검진받고 초음파를 보고, 중간에 입덧이 심해 제대로 먹지 못하고 빈혈이 심해 주말에 입원했던 날도 그는 나를 판단하거나 재촉하는 말은 꺼낸 적이 없었다.

내게 어떤 이웃은 그 병원의 다른 의사가 상대적으로 유명하고 더 실력이 좋다고 분만할 때는 의사를 바꿔보기를 추천했지만, 나는 그가 내게 보여준 모습들로 얻은 안정감을 선택하기로 했고 경험해 보지 못한 그 어떤 순간에도 그가 나를 잘 이끌어 줄 것이라 믿어보기로 했었다. 그 결과는 아주 작은 아쉬움이 되었지만 말이다.     

초음파 기계로 살아있는 작은 생명을 마주하는 순간이 내게는 신기한 첫 경험이겠으나 산부인과 의사에게는 그다지 감응할 만한 일은 아닐 텐데도 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하는 아기의 모습을 같이 놀라워했다. 산부인과를 선택한 이유를 묻는 것이 실례 같아 망설였으나 이 글을 쓰는 계기로 그에게 들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그 이유마저 따스하지 않을까 하는 짐작을 미리 해본다. 

    

두렵기만 했던 출산의 순간이 다가온 날, 10시간이 넘는 진통이 계속되고 거꾸로 돌아선 아이가 다시 머리를 아래쪽으로 돌려주기를 바라면서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씨름하던, 날카로운 수술용 칼이 어디를 베고 있는지 생생하게 감각 하던 날. 평소와 다르게 단호하고 강하게, 하지만 여러 분만실을 오가며 조금은 지쳤던 것도 같은 반쯤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내게 힘을 주었던 그의 격려 덕분에 무사히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울음소리와 함께 뭔가를 해냈다는 마음에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고 찢어진 부분을 봉합해야 한다며 조금만 더 누워 있으라는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흘렸던 땀으로 축축해진 시트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통증이 느껴져 아래를 보니 의료용 마스크와 모자, 수술복 앞섬까지 다 젖은 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둥근 인상의 짙은 눈썹, 그리고 무엇보다 집중하며 번뜩이는 눈빛.

조용히 다시 누워 그가 최선을 다하는 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새어 나오는 신음을 옅게 하려 입술을 앙 다물고 봉합을 마친 후 주의사항과 축하의 말을 들으며 서로 수고했다고 인사를 나눴다.


그에게 나는 수많은 산모 중 하나이지만 나는 그가 내 아이의 탄생을 도운 유일한 산부인과 의사라서 일순간 일어난 그 감사의 감정이 넘치듯 흘러나와 일어나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회복실로 자리를 옮기고 어지러움과 혈전 문제로 출산 후 회복이 쉽지 않았으나 (출산할 때 피를 너무 많이 쏟은 것이 원인) 나를 돌보는 이들의 정성 덕분에 회복했고 남들보다 늦은 퇴원을 하게 되었다.     

간호사에게 듣게 된 정보로 그가 제일 좋아하는 카페의 음료와 빵을 준비해서 퇴원하는 날, 감사의 말과 함께 전했을 때 활짝 피어나던 그의 웃음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물기 가득 그렁그렁하던 눈동자도.     

"저 산모한테 이런 거 처음 받아봐요. 회복도 더디고 몸도 힘들었을 텐데 이런 것까지 신경 써주고 고마워요."     

표현하지 못하거나 때를 놓쳤을 뿐이지 당신과 만났던 산모들이 당신에게 감사했을 거라고, 사람이 사람에게 받을 수 있는 마음들의 크기가 있다면 내가 당신에게 받은 것이 참으로 크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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