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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Feb 06. 2023

고부열전

티브이프로그램

드럼스캔 했던 그림들 받아오고,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렀다 먹고 싶었던 떡볶이를 포장해서

소파 바로 앞에 앉아 상을 펴고 늦은 점심을 먹으며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한국으로 시집온 필리핀 여성이 가난한 친정에 매달 돈을 보내고,

집수리를 한다는 명목으로 몇 백만 원씩 보내느라 주변에서 돈을 빌리고, 은행에서 더 이상 대출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빚을 져서 힘들어하는 내용부터 시청했는데 입맛이 뚝 떨어졌다.

한국인 남편과 주유소에서 세차하면서 어렵게 번 돈인데, 필리핀에 있는 친정아버지는 전화만 하면 돈이 나오는 줄 알고 밤낮없이 돈타령을 한다. 보다 못한 시어머니가 이렇게 살다가는 양 쪽 가정이 다 망한다며 내가 직접 사돈을 만나 해결해야겠다며 비행기에 몸을 싣고 떠났다. 


여기서 속이 뻥 뚫리는 사건의 전개를 기대했으나, 막상 도착한 친정집은 수리된 것 하나 없이 누워서 잠잘 공간도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고, 친정아버지는 술배가 두둑하게 나와 연신 민망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집 고친다, 뭘 사야 한다, 병원에 가야 한다 갖가지 핑계로 보낸 돈이 얼마인데 그걸 다 놀고먹는데 쓰고 친정 근처에 살고 있는 이웃들이 하나같이 그 아버지의 헤픈 씀씀이와 게으름에 대한 증언만 늘어놓는다.

필리핀에서 시집온 며느리 제니. 제니의 친정집에서 살이 통통히 올라 기름진 사람은 그 아버지라는 사람 하나였다. 다른 식구들은 너무 야위어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가장이면서 하는 일도 없고 방송국 사람들과 시어머니가 팔을 걷어붙여 집수리를 도울 때도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그를 보며 욕이 목 끝까지 차오르고 매우 화가 나서 눈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걸까. 


사위가 무릎을 꿇고 제발 술 줄이시고 가정을 돌보시라고 이야기하는 장면과 다른 집은 사위가 오면 맛있는 음식 차려놓고 대접하는데 그렇게 해주지 못한 친정집이 창피하고,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고 눈물 흘리는 제니의 인터뷰 장면에서는 목이 메어서 연신 콜라만 들이켰다.

그 한국인 남편도, 시어머니도, 제니도 모두 다 착한 사람들이라는 걸 느낄 수 있어서 기운이 빠졌다.

아. 저들의 삶이 더 나은 쪽으로 향하기는 힘들 수 있겠구나 싶어서 말이다.

자신들의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친정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서서히 끊어가겠다는 계획도 말 뿐일 테지..

그러기에는 너무 착한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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