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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언니 Feb 25. 2020

한국을 떠나

레벨 0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것

일상이 아닙니다. 인스타그램용 주말일 뿐...


한국을 떠났다.


속도 모르고 친구들은 말다. 탈조해서 좋겠다, 놀러 가면 재워 줄 방 있는 거지, 영어 많이 늘었겠다(이 말이 젤 싫음).


서른 다섯 해를 살았는데, 게임을 끝판까지는 아니어도 삼분의 이는 깬 것 같은데. 다시 레벨 0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기분이 산뜻할 순 없. 하다못해 장을 보러 가서도, 이민자는 백지상태로 당황. 나는 이미 선호를 형성해 버린 어른이었다. 아침으로 먹는 그레놀라는 풀무원이 좋았고, 해남 단호박으로 만든 어린이용 과자를 대놓고 먹었으며, 한 때 책을 엄청 팔아치운 이가 차린 회사에서 나오는 군고구마 말랭이를 좋아했다. 이제 아침에 먹는 시리얼부터 식빵, 요거트, 두부, 주전부리, 이런저런 반조리 식품이나 냉동식품들 등등을 다시 처음부터 테스트해보고 좌절해야 다.


여행지에선 마트에 가면 즐거웠던 것 같다. 맛이 좀 이상해도 아 뭐 얘네는 이런 걸 먹는다니, 하고 웃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쭉 살아야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뭐 얘네는 이런 걸 먹는다니, 에서 얘네를 담당하고 있다고. 이제 와 생각하니 아마존 프라임 나우에 올라오는 리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 별들이 없었다면 훨씬 이상한 걸 오래 먹었을 거.   


첫 해에는 우울과 무기력이 내 뒤를 질척대며 따라다다. 는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는데, 안 되는 걸 알면서 제 머리를 깎아보자면 이건 영 좋지 않았더랬다. 그렇다고 정신과에서 약을 받아먹을 정도까진 아니었고, 영어로 심리상담을 받아볼까도 생각했는데...... 흐흐, 앓느니 죽겠어요.


서울에선 어렵지 않게 약속을 잡았고, 대중교통을 타고 쉽게 이동했다. 커피와 케이크를 앞에 놓고, 아님 잘 못 마시는 술과 뜨끈한 안주를 놓고 오가던 별 쓸데없는 이야기들은, 알고 보니 꽤 쓸 데가 있었다. 그런 영양가 없어 보이는 수다가 서로를 얼마나 지탱해주고 있었는지, 없이 살아보니 알겠더라. 삼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귄 친구들도 여기 오니 다 리셋되어 버렸는데, 유학생들처럼 동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새 친구를 사귀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맛있는 케이크도 흔치 않았고.


속도 모르고 얘기하던 친구들에 대한 대답으로, 와서 적응하며 느낀 것들을 차분히 적어봐야겠다 마음먹다. 새로 떠나올 사람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 흔한 어학연수나 교환학생도 가본 적 없는 쌩토종 조선 종자가 미국에 와서 이민자로서 느낀 감정들을 생각날 때보다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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