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이 찾아준 루틴
나와 반려인은 롱디를 오래 했다. 이삿짐 컨테이너가 미국 항구에 들어오고, 우리는 살림을 합칠 수 있었다. 처음엔 아파트에 살았다. 걸어 나가면 바로 장 보고 쇼핑할 곳이 있고, 스타벅스도 있고, 버스를 나고 시내에 나가기도 편했다. 포켓몬 고가 엄청 유행할 때여서, 저녁식사 후 늘 나가서 걷던 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반려인이 회사에 가고 나면 나는 점심도 안 먹고 내리 잠만 잤다. 출근하지 않고 월급을 받지 않는 내가 나 같지 않았다. 물론 워크 퍼밋도 영주권도 나오기 전이니 뭘 할 수도 없었지만. 그동안 일하며 몸 상하는 줄도 몰랐으니 필요했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대상포진과 원형탈모, 건선 같은 자가면역질환들이 패키지로 찾아오고서야 이직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미국으로 오기 전 1년은 금전적 보상은 크지만 일은 재미없는 회사를 다녔고, 그 회사에서 받은 돈으로 스타트업에서 오래 일하며 구멍 난 재정을 메꿨다.
힘들었던 롱디를 끝내고 함께 살게 된 것은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데, 나는 이토록 우울하고 무기력하다니 웃기는 일이었다. 나중엔 immigrants, depression 같은 키워드로 논문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만 이런 건 아니구나, 안심이 됐다. 내 상태를 자각하고 나서는 온라인으로 받을 수 있는 심리상담을 찾았다. 한 분을 빼고는 전반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신뢰할 만한 분을 미리 알아두었으면 참 좋았겠다 생각했다. 상담은 언어와 문화적인 맥락도 중요한데, 이렇게 이민자가 많은 사회라면 다른 나라에서 훈련받은 사람들도 시스템 안에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도 했다. 찾아보니 해외에서 훈련받은 사람들도 개별적으로 심사하여 라이센스를 주고 있다. 근데 왜 이리 찾아봐도 하나도 안 나오는가... 나중에 이민이나 유학 오시는 분들 중 스스로의 멘탈이 그다지 세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주변에서 미리 괜찮은 분을 찾아 관계를 쌓고 오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하우스 헌팅이 마무리되고, 우리는 집을 샀다. 이사하고 새 집을 꾸미는 동안은 일이 산더미라 생각을 좀 덜 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시애틀의 겨울은 찾아왔고, 늘 흐리고 비가 왔고, 미국집은 아무리 불을 때 봐도 추웠고, 나는 새 집에서 덩그러니 남아 우울해졌다. 더 큰 세상을 만났지만 나는 이 공간에 유배되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새 집에서 나던 첫겨울, 늘 스스로를 강아지과라 주장하던 반려인은 고양이여도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강아지들이 반갑다고 달려드는 그 에너지와 맹목적인 충성심이 부담스러운 쪽이었다. 키워 본 언니들은 귀엽긴 아기 고양이가 귀여워도 첫 고양이는 성격이 이미 형성되고 사회화가 끝난 성묘가 좋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반려인의 옛 동료가 한국의 포인핸드 같은 사이트를 알려주었고, 나는 고양이들을 소개한 글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나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