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 앞에 보이는 집게핀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글쓰기
고명환 작가의 <고전이 답했다> 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도중에 작가가 미션을 냈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보이는 물건 중에 글쓰기로 연결하기 힘든 물건 하나를 소재로 글을 써보란다.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그냥 넘기고 계속 읽을까 하다가, 또한 나도 글이 쓰고 싶어져 끼적거려 보기로 했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부엌의 새하얀 식탁 위에는 어디서 굴러 들어왔던지, 그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사용한지 참으로 오래 된, 어쩌면 결혼하기 전부터 내가 쓰다가 얼떨결에 챙겨 나온 촌스러운 노란색 집게핀이 하나 놓여져 있다. 세안을 마치고, 온갖 에센스와 크림을 바를 때에 걸리적 거리는 앞머리를 고정시켜주는 유용한 이 집게핀은 막상 없으면 서운한 존재다. 화장대에서의 볼 일을 마치고, 제자리에 두었어야 했는데 무심결에 따라나와 있을 곳이 아닌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잠시 눈에 거슬려 제자리에 가져다 둘까 하다가, 그보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책을 읽고 또 그 책에서 시키는 글쓰기니 그냥 잠시 그 자리에 두기로 했다. 아무래도 지금 내가 몰두하고 있는 이 작업이 끝나야지만, 집게핀은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겠다.
정신까지 흐물흐물 녹아버릴 것만 같은 태양의 열기로 맥을 못추겠는 요즘, 더 이상 흐물거리지 않기를, 그 무언가가 나를 좀 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건 분명 사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 작업이었기에 그저 항상 그래왔듯 나는 다시 책에 기댔다. 처음엔 이 책을 도서관에 예약을 걸어 두었었는데, 기별이 없어도 너무 없어 반포기 상태에 였었다. 그러다 우연히 통신사앱을 뒤적거리게 되었고, '교보문고 전자책 한달 무료 구독권'을 발견했다.
전자책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상당히 아날로그적인 사람인지라 잠시 망설였지만 지금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속는 셈치고 한 번 더 시도해 보기로 했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진즉에 책을 샀겠지만, 이 방, 저 방 책이 넘쳐나는지라 자중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달리 선택권은 없었다. '우주의 강한 기운'이 꼭 이 책을 읽어 보라 속삭이는 듯 했다고 하면 '사이비'처럼 들리려나?
그렇게 해서 자석에 이끌리듯 나는 책을 읽기 시작하였고, 무심결에 나도 모르게 읽어 왔던 고전에 대해, 다시 마땅히 읽어야 할 이유를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와 함께 요근래 일상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올라 오는 막연한 불안과 늘어짐 혹은 처짐이 결코 날씨 때문이 아님을 알게 되었는데, 이를 깨닫게 된 계기가 책을 읽다말고 눈 앞에 보이는 사물에 관해 쓰면서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
여전히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었고, 책을 읽고 있었지만 조금 더 농밀하게 나를 파고드는 '글쓰기'를 위한 시간을 내 자신에게 허락하지 못한 시간이 누적됨으로 잠시 바다 위에 표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나 보다. 나에게 글쓰기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였던건지 단전부터 자각함으로 브런치 가게를 다시 열었다. 써야지 숨통이 트이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였던가는 어쩌면 매일 열정으로 써봤기에 또한 알 수 있는걸까.
대단한 '작가 정신' 따위에서 비롯된 '쓰기의 시작'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대단한 결심 없이도 그냥 써야하는 인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