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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욕심만 드글드글한 흰머리 지긋한 어른

by 엘샤랄라

토요일 오후, 아이의 예술 수업이 있어서 아트센터에 왔다. 아이를 기다리며 1층 커피숍에 앉아 있다. 서평에세이를 마무리 하기 위해 노트북을 펼친다. 센터 관련 사람들이 들락날락 거리며 분주하다. 이미 오전에 커피를 마셨기에 커피 주문을 자제한다. 대신 아이스홍차라떼를 주문했다. 커피는 아니지만 달달하니 좋다. 앉은 자리 뒤로는 통유리로 되어 있는데, 태양이 어찌나 뜨거운지 등이 바싹 타버릴 것 같았다. 일광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혹했기에 음료를 주문하며 블라인드를 쳐달라고 부탁했다. 곧 블라인드가 내려지고 나 혼자 느끼는 아늑함에 본격적으로 글을 마무리 할 수 있는 준비가 된듯 하다.


주변을 휘익 한바퀴 둘러 보니, 왼쪽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홀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오른쪽은 함께 수업을 듣는 수강생들이 모였는지 시끌벅적하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나의 생각에 집중하고자 애를 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지만, 끝내야 하는 일이 우선이다. 그러다가 생각이 엉뚱한 사색으로 튕겨 나갔다.


세상을 조금 사셨다는 분들에게서 드글드글한 욕심을 종종 목격한다. 이번 여름 대학동기네 가족과 워터파크에 갔다. 여러 개의 풀장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적당하게 따뜻하고 또한 적당히 깊은 풀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어르신들이 많이 보인다. 그 분들을 보면 꼭 어렸을 적 나의 외할머니, 친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 눈가에 비친 주름은 그윽한 눈을 더욱 따뜻하게 포장해 주는 주름이었다. 그 풀장 옆으로는 닥터피시를 경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친구의 아들과 우리집 아들은 각질을 뜯어 먹기 위해 달라 붙는 물고기들이 신기한지 무척이나 적극적인 의욕을 보였다. 새로운 경험이니, 결제를 해주고 들여 보낸다.


친구와 나는 닥터피시를 하고 있는 두 아이를 지켜보기 위해 다시 풀에 들어와 아이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아이들이 잘 보이는 풀장 가장자리로는, 수압으로 마사지를 받을 수 있게 되어있다. 한 사람당 10분 이내로 끝내라 안내문이 붙어 있지만, 마사지가 좋으신 어르신들은 도대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돌부처처럼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자신의 자리인 것 마냥 꼼짝 않고 앉아서 세를 놓을 판이다. 한참을 기다리는데도 자리가 나지 않다가 한 자리가 나왔다. 내가 먼저 갔다. 그리고 곧 한자리 옆에 자리가 났다.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 요량으로 친구와 대화를 나누기에는 거리가 애매하다. 물소리에 목소리가 잠긴다. 눈치를 보다가 친구와 나 사이에서 한참이나 떠날 생각 없이 마사지를 받으시던 할머니에게 온갖 아양을 장착하고 말을 건넸다. 옆에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서 그러는데 자리를 바꿔주실 수 있는지 부탁드렸다.


그리고 그 부탁은 막연히 내가 생각하는 어르신들에 대한 말랑말랑한 이미지를 처참하게 짓밟아 놓았다.


나의 부탁은 바로 튕겨져 나왔다. 굳은 입술로 싫다면서 즉각 거절하신다. 얼마나 대단한 자리라고 그거 하나 못 바꿔 주시나. 왜 안된다는 것인지 궁금해서 여쭤본다. 자기가 싫단다. 부당한 요구였을까. 나이가 들수록 더 이기적으로 늙어가는 걸까. 아니면 친구랑 같이 있고 싶은 생각에 내가 더 이기적으로 굴었던 걸까. 물론 자리를 바꿔야 하는 의무는 없으나, 어쩌면 그보다 더 아쉬웠던 것은 그의 표정이었겠다. 앙 다문 입술에 한 숟가락의 정조차 없어 보였던 그 눈매하며, 콧김마저 흥흥 나올 기세였다. 친구와 나는 눈짓을 주고 받으며 자리를 지켰다.


뜻하지 않은 어르신과의 조우는 앞으로 나이를 먹게 될 나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어떻게 나이를 먹어야 할까.


두려운 건, 늘어나는 나이와 함께 유연성과는 점점 멀어지진 않을까 하는 점이다. 내가 살아온 방식만이 옳은 방식이라 우기며 그렇게 꼰대가 되어 갈까봐 두렵다. 나의 정답만을 강요하게 될까봐 두렵다. 하나를 가지면 더 가지고 싶어할까 하는 걱정도 있다. 우아하게 나이를 먹는 어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려본다.


그런 어른은 어떤 어른일지 그려보기 시작했다. 이미 작고하신 작가님들이 먼저 떠올랐다. 그 분들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그 작품 속 문장들을 마주한다. 그분들의 삶을 다시 그려본다. 그리고 또 요즘 한국무용 수업에서 함께 무용을 배우는 어르신들의 모습도. 얼마든지 우아하게 포용하며 들어주는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닮아가고 싶은 어른이 이미 내 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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