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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아닌 불청객

어느 가을 날

by 엘샤랄라

지극히 주관적인 불청객의 등장이었다.


토요일 오후, 아들의 로봇 대회가 있어서 접수 신청을 마무리하고 안으로 들여보냈다. 대략 세 시간 정도 대기하고 있어야 했기에 같은 건물 안에 '학부모 대기장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차로 가서 노트북과 읽을 책을 챙겨 나왔다. 안내원에게 학부모 대기장소를 여쭤 보았더니 설명을 해주시긴 했는데, 막상 가보니 그곳은 그저 개회식이 열리는 장소였을 뿐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주변에 카페가 있으려니 하며 교문 밖을 나서서 둘러보는데 딱히 들어갈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어정쩡한 분위기에서 카페에 녹아들지 못하고 앉아 있을 바에야 대회장 안에서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 간단히 먹을 것을 산 후 다시 대회장으로 향했다. 대회장으로 향하는 정문은 여느 대학교처럼 급경사를 이루었다. 청년들의 체력단련을 위하여 꼭 학교들은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천천히 오르는데, 뒤에서 헉헉 거리며 올라가시던 분이 내 재킷이 끌린다며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신다.


사람들이 유난히 모여 있는 곳을 피해서 대회장을 찾아가며 물색해 두었던 정자로 향했다. 대학교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자리 잡은 정자로 지난밤에 비가 와서 테이블은 살짝 물기가 비쳤지만 의자는 말끔했다. 되려 비가 왔기에 깨끗이 씻겼겠다 싶은 혼자만의 바람을 담아 자리를 잡았다. 여름이 물러가고, 찾아온 가을 공기가 선선했기에 여기서라면 세 시간도 거뜬하겠다며 내심 장담하였다. 욕심은 많아서 이미 다 읽고 글을 쓸까 하여 한 권,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 두 권, 도합 세 권을 탁자 위에 꺼냈다. 글을 쓰기 전에 책 좀 읽으며 예열을 할까 해서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십오 분 정도 흘렀으려나.


중년의 부부가 내가 자리한 탁자 옆의 음료 자판기를 보고 다가온다. 그곳에서 캔커피 하나를 뽑고,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가까이 자리를 잡았다. 탁자는 세 개였고, 나는 그중 가운데에 앉아 있었기에 어디에 앉든 그분들은 나와 근접하게 앉을 수밖에 없는 위치인 건 나도 알겠는데 정말로 그 자리에 자리를 잡을 줄은 몰랐다. 학교는 넓었다. 대학교 자판기의 캔커피는 그래도 학생들을 위한 거니 조금 저렴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비싸다며 부부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학교를 검색하고 학교와 관련된 재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본인들의 향후 계획까지 대화는 중도에 멈출 새 없이 이어졌다. 중간에 **대학에 들어간 조카 이야기를 할 때에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버벅대던 여자분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공감이 가서 같이 대화에 은근슬쩍 참여하며 웃을 뻔했다. 이러다가는 아무래도 그들의 대화에 내 의식의 흐름이 얹혀갈까 하는 두려움이 들어서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고도의 훈련 과정이다. 글을 마무리하고, 다시 책을 집어 들었지만 몰입도가 떨어져서 스트레칭도 할 겸 걷다가 건너편 탁자가 비어 있길래 그곳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그늘이 졌지만 이 전에 앉아있던 곳처럼 지붕이 있지는 않아서 가을 햇살이 간접적으로 비추었다. 눈이 부셔서 눈이 적응하도록 잠시 기다려줬다. 그렇게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하는데, 점점 기분이 좋아진다. 뜻하지 않은 불청객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더 좋다. 모기가 책 앞에서 알짱거리던 것도 없고, 탁 트인 개방감에 눈을 돌리면 멀리 운동장이 보였다. 책을 손에 집고 몰입할수록 공간 안의 공간 속 나는 진공 상태로 머물게 된다. 오며 가며 사람들이 지나다니지만, 나에게 그 소리는 아득하기만 하다. 그저 나는 책 속 주인공 요셉의 이야기에 빠져 있을 뿐이다. 나는 가을이었지만, 그 안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겨울이었고, 나는 그 겨울,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류와 요셉의 인연에 아쉽지만 그럼에도 다시는 만나서는 안되는 이별의 정당성에 가슴이 절절하다.


그들의 사연에 푹 빠져 있는 동안, 넌지시 나를 응시하는 가을볕에 취해 의자에 뒷목을 기대고 바람으로 숨을 쉬다가 서서히 눈을 감고 단잠에 빠졌다. 불청객들이 아니었다면 시도해 보지 않았을 이토록 낯선 공간에서의 단잠이라니. 집에서야 베개에 머리만 대도 잠을 자는 나지만,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서 시도 때도 없이 잠이 드는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어영부영 선잠에 빠지고 말았다. 생각지 못한 달달한 휴식으로 기운을 얻은 나는 책을 마저 읽었다. 마지막으로 여주인공 류를 보내며 이제 책장을 덮는다. 아들을 마중하러 가야 한다.


기다림은 언제나 나에게 고역이었지만, 이제 나는 그 기다림을 즐긴다. 기다리는 시간에 나에게 찾아오는 고독을 두 팔 벌려 환영한다. 그곳이 어디든 나는 그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느끼곤 했는데, 그 기분 또한 즐긴다. 같은 공간 안에서 나는 책으로 또 다른 시공간을 여행한다. 그 이중성이 점점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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