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우리의 침울한 두 눈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이상의 행복이 있는 법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제발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간절히 원하던 때가 있었다.
어쩐 일인지 부모님은 시험 전날 유독 언성이 높아지셨다. 딸이 내일 시험인 걸 아시는 건지, 모르시는 건지.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아버지에게 큰 사고가 났을 때에도, 내 눈에는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만 보였다. 연애만 6년을 하고서 사랑으로 결혼을 약속한 남자는 결혼할 즈음에 헌신을 다했던 회사에서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으며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고, 그 길로 자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긴긴 고생길을 열었다. 꼭 낳고 싶어서 임신하여 아들을 출산하게 되었지만, 막상 그 아이를 키우는 일은 기대 이상의 인내와 체력을 요구했다. 꽉 찬 수업으로 지쳐있는 와중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새벽마다 밥 달라고 울어대고, 잠이 안 온다고 보챘다.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때는 언제 찾아올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며 마흔이 되던 1월, 거짓말 같이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나는 나의 일을 하고, 남편은 자신의 사업에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기저귀를 벗고, 스스로 샤워를 하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친정아버지는 고향으로 내려가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하셨고, 친정어머니는 장구에 푹 빠지셔서 신명 난 일상을 보내고 계셨다. 시부모님 또한 자신의 자리를 지키시며 자식들 잘되기를 항상 기도해 주셨다. 드디어 내가 그토록 바라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때가 온 건가 싶은 바로 그 순간, 나는 빈항아리가 되고 말았다.
열심히 손에 쥐려고 아등바등했던 세월이었는데, 막상 내 손을 펼쳐보니 쥔 것이 없었다. 너무 빠르게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다지고 갈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기억도 없었다. 추억도 가물가물했다. 두 눈은 침울했다. 보통은 아이들 다 키우고 갱년기와 맞물려 오는 그 상실감을 나는 마흔에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기 시작했다. 너무 바쁘게 '아무 일'을 해치우기만 하며 산 것 같았다. 의욕이 떨어지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다시 막막해졌다. 그때가 2023년 1월과 2월이었다. 하지만 그 먹먹했던 시간은 바로 삶의 무게추를 외부에서 나 자신으로 옮기는 순간이었다.
나에게로 옮겨진 무게 추는 이제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을 원했다. 그저 '나'로서의 삶을 되찾아 보라고, 시도해 보라고 외치고 있었다. '나'를 찾겠다는 그 목소리에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스러움은 남편에게도 전해져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남편은 지속적으로 나의 안위를 살폈다. 나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미 나에게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나 보다. 그때부터였다. 마흔이 아닌 두 번째 스무 살을 맞이하게 된 것이. 기대를 품고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처럼, 나는 블로그에 나의 이야기를 담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를 알아가는 질문들을 품고 나에 대해 배워 나갔다. 서서히 지워지는 나를 붙잡으며 그려 나갔다. 기억이 되살아나며 윤곽이 드러났다. 드러난 윤곽에 반갑다 인사하고 나다움이 물씬 풍기기 시작했다. 직업인으로서 드러나는 나의 모습이 아닌, 그저 나로서의 모습이다. 그 어떤 고가의 영양제와 비타민으로도 채울 수 없는 활력이 나를 채워 나간다.
쉬지 않고 글을 써 나갔다. 쓰면 쓸수록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가는 기분이었다. 어쩐 일인지 없던 기억력이 되살아 났다. 묻어놨던 장면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덮어 두었던 나의 감정을 오롯이 인정해 주는 시간을 가졌다. 메말랐던 눈물샘이 터져 나왔고,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행복한 순간들을 부여잡았다. 그저 매일 숨을 쉬므로 그 가치를 모르는 '공기'처럼, 내 주변의 공기 같았던 많은 일들에 나만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쓰며 나를 채운다. 글을 쓰며 나를 돌본다. 별 일 아니었던 이야기를 쏟아내며, 나라는 사람 참 괜찮다 인정해 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삶'에서 이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당당하게 계속해본다. 그래야 지금처럼 나의 잔잔한 일상이 지속될 테니.